6월 대만에서 처음 학회 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 학문 커리어에서 첫 발표였습니다.
첫 발표인데다가, 영어로 발표하게 되어 긴장을 많이 했는데요. 잊지 못할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후기를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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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APPSA 참여 후기: 첫 학술 발표, 설레었던 데뷔 무대
박사를 수료하고 나서 꽤 오랜 시간 동안 학술대회에서 발표란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PSA around world 2023, 지난 APPSA, 심지어 매년 열리는 과학철학회 학술대회까지 기회가 참 많았다. 이렇게 많은 기회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발표를 하지 못했을까? 생각해보면 ‘남들에게 내놓을 만한 떳떳한 성과물일까?’라는 질문이 늘 결정을 미루게 했던 요인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이번 APPSA에서 첫 발표를 하게 되었다. 대단한 생각의 전환이라기보다는 단순한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허 박사님의 권유가 매우 큰 동인이었는데, “저번 대만 APPSA가 음식이 매우 맛있었는데, 이번 대만 APPSA도 음식이 맛있지 않겠나?”라는 논증 때문이었다(실제로 음식은 매우 맛있긴 했다). 그리고 학회 겸 여행도 즐겨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물론 그때도 내 성과물이 남들에게 내세울 만큼 충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영어도 자신있지 않았기에, APPSA 발표를 잘할 수 있을지 의문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연한 희망은 있었는데, 마침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 업체에서 기약없이 쉬고있던 탓에, 계획에 없던 시간이 굉장히 많이 생겼는데, 그 시간 동안 매일 스터디카페에 다니면서 아이디어를 다듬어 나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APPSA가 좋은 배수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500words도 안되는 APPSA 초록을 작성하는데 한 달 정도가 걸렸는데, 그것은 영어 문장 작성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내 아이디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APPSA의 초록 기한은 나의 주된 아이디어를 짜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만약 APPSA에 지원할 생각이 없었다면,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고민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성향상 아이디어 형성은 더욱 늦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운이 좋게 발표자로 선정이 되어 이번 6월에 APPSA에 다녀오게 되었다. 이번 APPSA는 매우 잘 준비된 학회였고, 정말 만족스러웠다. 첫째로 과학철학의 저명한 교수님들을 연사로 모셔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두 분의 트랜디한 발표도 좋았지만, 책으로만 볼 수 있는 학자들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고 함께 어울렸던 것은 큰 자극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자잘한 이벤트들이 정말 많았다. 가령 Chat corner가 있어서, job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장학금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박사를 졸업하는 법, 과학적 실재론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학회가 좋았던 것은 이야기 시간이 대단히 많았다는 것이다. 전체 학회에서 30%~40% 정도가 이야기 시간이었던 것 같다. 아침에 30분 커피 마시면서 인사, 점심에 2시간 이야기 시간, 오후에 1시간 커피 브레이크, 저녁에 2~3시간 정도 리셉션 타임 등. 많은 이야기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덕분에 이번 학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었는데, 특히 홋카이도 대학의 박사과정생인 Sato Kosuke 군과 많이 친해졌다. Kosuke 군의 성실함은 나의 게으름을 반성하게 했다. Kosuke 군이 작별인사를 할 때, “We should meet”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 언제든 연구 근황을 이야기할 수 있는 동료가 생긴 것 같아 무척 좋았다. 추후에 성장한 모습으로 Kosuke군과 좀 더 진전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다음으로 나의 발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ppt는 발표 당일 오전 9시까지 제출이었다. 나는 호텔 로비에서 밤새 ppt 작업을 하여, 결국 발표 당일 새벽 6시에 ppt를 완성했다. 발표 당일 오전에는 keynote speech을 듣고, 오후에는 발표 시간(오후 5시)까지 ppt 원고 작업에 매달렸다. 원고를 외우는 것은 언감생심이었고, 그저 긴장하지 않고 원고를 막힘없이 읽을 수 있기를 바랐다.
내 발표는 고인석 선생님 발표 다음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고인석 선생님 발표 후 많은 사람들이 나갈줄 알았는데, 의외로 내 발표를 듣기 위해 앉아있는 사람들이 꽤 있어 놀랐다. 발표는 어떻게든 마무리했지만, 너무 긴장해서 어떻게 발표를 진행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원고가 적혀있는 아이패드에 “심하게” 의존한 것, 발표 시간을 20분을 넘기는 것은 용납이 안되는 일이어서 “skip”, “skip”을 가끔 외쳤던 것 등이다.
첫 데뷔 무대이기 때문에, 성공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질문은 비교적 많이 나왔다. 특히 한 분(아, 연락처를 주고받았어야 했는데!)이 기억나는데, 발표가 끝난 이후 개인적으로 다가와 내 발표에 흥미를 나타내며 ‘당신의 아이디어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Claim들은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상위 저널에 내봐라’ 등으로 칭찬, 격려를 해주신 분이 기억난다. 당시에는 매우 부끄러웠지만 ‘내 발표가 그다지 터무니없지는 않았구나!’ 라는 생각에 자신감을 많이 얻었다.
발표에서 특히 아쉬운 것은 청중들의 반응을 살피고 함께 호흡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청중들의 반응을 살펴보면서 강연의 템포를 조절해야 했지만, 아이패드와 슬라이드에만 집중한 나머지 청중의 표정이나 반응을 살펴볼 틈이 없었다.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일도 있었다. 발표와 질의 응답을 다 끝내고 허탈한 표정으로 있는데, 누군가 등 뒤에서 내 어깨를 토닥이고 떠나셨다. 알고보니 지도교수님이셨다. 허 박사님은 지도교수님이 맨 앞자리에서 발표 시작부터 끝까지 발표를 들으셨다고 알려주셨다. 나는 아이패드만 본 나머지, 시야가 좁아진 탓에 발표 시작부터 끝까지 맨 앞자리에 지도교수님이 앉아계신지도 모르고 발표했던 것이다. 다음부터는 조금 더 청중과의 호흡에 신경을 써야겠다고 느꼈다.
마지막으로 학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만약 해외 발표를 고민 중인 학우분이 있다면, 기회가 있을 때 꼭 해외에서 학술 발표를 도전해보길 권유하고 싶다. 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영어는 제 1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원어민처럼 유창하게 영어를 못하는 것은 흠이 아니다. 작성한 원고를 보면서 ppt 발표를 한다해도 청중들이 이해하는데는 큰 문제가 없다.
혹여 자신의 연구 퀄리티에 대해 의문이 있다해도, 큰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될 것 같다. APPSA에서는 흥미롭고 완결성있는 발표도 많이 있었지만, 아직 성숙하지 않은 아이디어들을 발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우분들도 충분히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ChatGPT 같은 든든한 우군이 있는 이 좋은 시대에, 해외 학자들과 교류할 기회를 망설이지 말고 꼭 잡아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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