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서양철학사를 완독하는 것은 예전부터 가져온 소망이었지만, 긴 분량에 압도되기도 했고, 여러 작업으로 인해 여력이 허락되지 않아 지체되기만 했었다. 더 이상 길어지면 안될 것 같아, 최근에 틈틈히 러셀 서양철학사를 읽으려 시도하고 있다.

최근 러셀 서양철학사와 관련한 책 리뷰를 보다가, 평점 2점을 준 리뷰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공감표시도 제법 있었는데, 평은 다음과 같다.

"야심차게 쓰인 철학사책이지만 한 사상을 담백하게 설명하기 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강조하는데 치중해있다. 자기자랑은 철학사책의 미덕이 아니다."

가혹한 평가이다. 그런데 이러한 평이 정말 타당할까? 이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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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학사책의 미덕? : 철학 사상에 대한 객관적 서술이 진정 가능하긴 한가? 

저자의 '철학사책의 미덕'이 무엇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한 가지 해석은, 최대한 의견을 내지 않고(주관없이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해당 철학자 텍스트를 꼼꼼하게 분석하고 해석하는데 치중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객관적인 텍스트 해석이란 것이 정말 가당키나 할까? 저자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 있어 독자의 주관이 가미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 같다.

가령,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에 대해 어떤 학자는 과학의 합리성에 위협을 가하는 사람으로, 다른 학자는 합리성에 우호적인 사람으로 해석한다. 또한 "어느 것이든 좋다"라고 외친 파이어아벤트에 대해 과학에 있어 최악의 적(The worst enemy of science)으로 본 학자가 있는 반면, 파이어아벤트를 온건하게 보는 진영도 존재한다. 

이러한 해석 논쟁은 텍스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철학자의 주관이 필연적으로 개입함을 잘 보여준다. 같은 텍스트를 읽었음에도 중요하다고 간주한 텍스트(글귀)가 제각각이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석 중 옳은 해석은 무엇일까? 만약 그들 모두 자신의 해석이 정당함을 설득력있게 보이고 있다면, 이는 결정하기 힘든 열린 문제이다.

러셀도 철학자를 해석하는 것에서 자신의 주관이 들어간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러셀은 철학자의 견해를 왜곡한 것일까? 완독은 아직 못했으나 그렇다고 결론내리긴 힘들 것 같다. 러셀은 나름의 문헌과 근거를 들어 자신의 해석에 대해 나름의 정당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령 러셀의 주관적 해석이 가미되었다고 해서 이를 "'철학사책의 미덕'을 위반했다"라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곡이라고 밝혀지지 않은 이상, 이러한 결론은 무척 성급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중립적인 텍스트 해석? 가당치도 않다!]

 

2. 자기자랑? : 철학 사상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제기하는 것이 뭐가 그리 못마땅한가?

저자의 '철학사책의 미덕'에 대한 또다른 해석은, 철학사를 다룬 책이라면 철학자의 사상을 담백하게 설명[각주:1]하는데 집중해야지, 괜히 철학자를 비판하는 식의 자기 자랑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하다. 

다시 말해, 저자가 혹평을 가한 이유는 아마 러셀의 비판이 들어간 점이 아닐까 한다. 즉, 저자의 사상이나 -담백하게?- 소개하면 되지, 본인이 괜히 나서서 철학자의 견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등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분명 중립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이미 텍스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해석자의 주관이 개입되므로, -철학자의 문헌을 복사하는 것 외에는- 객관적인 서술은 어려울 것이다.]

러셀 서양철학사는 다른 철학사 책 보다도 러셀 자신의 특유의 견해가 가미되었다는 것이 주요한 특징이다. 즉, 철학자의 사상을 소개한 뒤, 이에 대해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례로 플라톤 장에서는 플라톤을 소개한 뒤, 플라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 그 예이다.

그런데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는 것이 뭐가 나쁜가? 철학자의 견해를 그냥 본인의 의견없이 단조롭게 서술하는 책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의견없이 지식의 단조로운 나열은 교과서와 다를 것이 없다. 물론 교과서도 정보 전달 측면에서 나름의 중요성이 분명 있지만, 이러한 서술 방식이 철학적인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될지 의심스럽다. 철학적 글쓰기든 철학적 사고든, 결국 철학이란 것의 요지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이를 설득력있게 정당화하는 데 있다. 이 점에서 러셀의 글쓰기 방식(정당화 방식)은 분명 철학적 훈련을 하는데 좋은 교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러셀의 이러한 의견 개진은 우리의 생각은 한층 더 풍부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읽으면서, 정보 전달(철학자의 사상)뿐만 아니라, '러셀의 견해가 정말 옳은가?, 철학자를 변호할 여지는 있나' 등에 대해 추가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철학자들의 논의도 더 풍부해 질 것이다. 즉, 러셀의 논의로 인해 촉발되어 다른 철학자들도 여러 의견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철학자의 사상에 대해 다양한 논의들을 맛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논의의 장을 흥미롭게 지켜보면 된다. 이러한 심층적 논의들은 우리의 지적 성장에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점에서 러셀의 의견 개진은 단순히 '자기 자랑'으로 격하할만한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러한 평이 정말 이 책에 유효한 비평일지 의심스럽다.

 

(23.02.15)

 

 

 

  1. 다만, 사상을 '담백하게' 설명하는게 무엇인지는 분명하진 않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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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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