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을 가는 도중, 캠퍼스를 견학하는 아이들을 보았다.

인솔자는 그 아이들에게 "좋아하는 일을 해라"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라면 아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줄까"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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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창시절에 알고 있는 직업이 정말 몇 개 안 됐다. 그저 다른 과목보다 화학을 잘했고, 학점을 잘 받겠다 싶어서 화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좋아해서 선택한 화학이기에 화학자가 되어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대학교 2학년 때, '진로 찾기' 교양 수업에서 직업 빙고 게임을 한 적이 있다. 5*5 빙고 칸에 직업을 채우는 게임이었는데, 학생들은 처음에 빙고 칸을 다 채울 것이라고 자신했지만, 특정 숫자를 넘어가자 많은 학생들이 5*5를 채우는 것을 힘겨워했다. 설령 25칸을 어찌어찌 다 채웠다 해도, 모두 거의 비슷한 답을 적어내었다. 반면, 강사님은 생소한 직업들을 빙고칸에 넣었다[각주:1]. 세상에는 참 많은 직업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입시 위주의 교육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보통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장래희망이 뚜렷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성적에 맞춰서[각주:2] 대학에 들어가고, 대학에서는 전공 공부를 한다. 그러다 대학 졸업반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직업을 찾게 된다. 이 시기에는 빨리 취업을 해야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일을 파악하기보다는 일의 난이도나 워라벨, 연봉들을 찾아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대학때 힘겹게 배운 전공과 무관한 직업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졸업 후 워라벨, 안정성이 좋다고 여겨지는 공무원이나, 공기업 등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각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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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나라면 어떻게 조언할까? 

나라면 "우선 최대한 많은 직업들을 찾아보고,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라"라고 이야기할 것 같다.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라'라는 말은 무척 따뜻하고 좋은 말이지만, 자칫 학생에게 선택에 대한 강박, 조급함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학생 때에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좋아하는 것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사와 성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경험의 폭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관심사를 제대로 모르면,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착각할 위험이 있다. 결국 자신의 성향과 관련없이 화려함, 연봉, 워라벨 등에 기반하여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나의 목표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한편 경험의 폭은 직업 만족도를 좌우한다. 10가지 직업 중 하나를 고르는 것과, 100가지 일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은 선택의 질 자체가 다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다양한 직업 세계를 미리 접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할까? 책, 다큐, 직업 인터뷰 등을 통해 다양한 직업의 세계를 들여다 보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주제로 심리 검사를 받거나 글(일기 등)을 쓰면서 자신의 관심사를 파악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좋아하는 일을 해라'는 말이 힘이 되려면, 그 전에 '나와 세상을 아는 시간'이 먼저 필요하다. 나는 학생이 좋아하는 것을 꼭 지금 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학창시절 때의 총명함과 건강함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시간이다. 그 동안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고, 더 많은 세상과 더 많은 일들을 만나보면서, 좋은 선택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25.05.26)

 

 

 

 

  1.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려는 의도에서 그랬던 것 같다. [본문으로]
  2. 가령 생물을 잘하면 생물학 관련 전공에 들어가고, 학교 간판을 보는 경우 낮은 학과에 지원하는 방식 [본문으로]
  3. "전공과 사회진출 진로의 불일치, 이유가 뭘까?" https://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841664#cb 대학 졸업생들이 왜 전공과 다른 진로를 택하는지 잘 소개되어 있는 기사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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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동사의 멸종 - 예스24

인간 사회라는 야생에서멸종되어 가는 몇몇 직업―동사의 이야기첫 책 『퀴닝』(‘인간의 조건’ 개정판)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고, 두 번째 책 『고기로 태어나서』로 제59회 한국출판문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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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저가는 직업들을 직접 체험하고, 그 후기를 쓴 책이다. 

경험기라는 점에서 이 책은 분명 가치가 있다. 

다만, 글마다 비유가 너무 많아서 몰입을 방해하는 면이 있었다. 

저자의 비유보다 상황 그자체를 담담하게 보여주었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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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 알라딘

저자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답할 수 없었던 질문, “왜 세계는 이토록 불평등한가?”에 정면으로 답한다. 자본주의가 괴물이 되어버린 지금,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다음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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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과외로 인해 읽었다. 짧은 길이의 책이어서 큰 부담없이 하루면 단숨에 읽을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저자만의 해결책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평가절하할 이유는 못될 것 같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사회, 경제 체제에 대해 생각해 볼 거리를 던진다는 점에서 좋은 자극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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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 : 알라딘

버트런드 러셀이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회의주의라는 색다른 시각을 제안하고 있는 책. 정말 착한 사람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가? 아이들은 지금 평등한 교육을 받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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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산건 대략 10년 전 즈음이었던 것 같다. 버트란트 러셀의 글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다른 책들과 달리 이 책은 영 읽을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지식이 부족한 탓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이번 연휴를 계기로 거의 10년만에 이 책을 다시 읽었다. 그런데도 이 책이 여전히 쉽게 읽히지가 않았다. 

이번에는 원서와 비교하며 읽었는데, 번역에 문제가 많음을 알게되었다.

 

문장에서 빠진 부분도 있고, 해석을 반대로 한 부분도 있었다. 이로 인해 전후 문장이 매끄럽지 않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이런 부분이 확인되면 원서를 보고 원 해석과 비교했다. 이로 인해 보통 책읽기보다 2~3배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다. 

 

나는 번역하시는 분들을 존중하는 감정이 있다. 번역은 기본적으로 잘해야 본전이고, 못하면 비난만 듣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 책은 번역의 질이 너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러셀의 생각과 아예 반대로 번역한 것도 있었고, 오역도 있었으며 [각주:1], 번역하면서 빠진 원서 문장들도 있었다. 

이런 부분은 원서와 대조하면 충분히 교정할 수 있는 문제였을텐데... 정말 아쉽다.

 

 

 

 

  1. 가령 [lest ~should(~하지 않도록)을 다르게 번역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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