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면서 크게 좌절한 적을 뽑으라면

대학교 2학년때가 아닐까 한다.

 

전과하기전 화학과 전공을 하나 들었다.

과목은 유기화학이었는데 D를 받았다.

 

말이좋아 D지

출석은 잘 했기에

최하점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성적을 받고

3일간 전전긍긍했다.

 

3일간 고통속에서 생각을 한뒤

나는 머리가 돌이거나

화학과는 적성/흥미가 안 맞는 것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군대에 갔다-----

 

나는 군대에서 근기수방을 썼는데,

근기수방은 자신의 계급과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방을 말한다.

 

우리는 서로 친해서 자기전에 많은 얘기들을 하곤했다.

 

A: 나가서 뭐하지?

B: 정원호 일병님은 나가면 뭐하실껍니까? 화학자? 연구원?

원: 글쎄..... 화학이랑 나는 안맞는 것같아서

B: 그런데 이미 전과하지 않았습니까?

원: 응 그렇긴 한데 성적이 잘 안나오네.

아마 머리가 돌이려나? 나랑 잘 안맞는 것같아

 

B: 공부는 많이 하셨습니까?

원: 뭐 시험준비기간은 10일정도 잡고 3시간 정도? 교재의 연습문제 해답보고 풀고 뭐 그랬던 것같은데

B: 예습/복습은 하셨습니까?

원: 응? 안했는데?

 

A,B,C,D: 에??

B: 그런데 그런 성적을 바랬습니까?

A: 허! 참 머리가 뭐가 돌이라는 거야. 어이가 없네.

 

원: 다들 얼마나하길래 그래?

A: 예습은 못하더라도 적어도 복습은 매번 해야되는 거 아닌가?

C: 정원호 일병님 공부 너무 안하신 것 아닙니까? ㅋㅋㅋㅋㅋ

 

원: 어...? 내가 잘못생각했나?

나는 그정도만 하면, 좋은 성적이 나와야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는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년 1학년때까지

벼락치기 공부방법을 계속 고수해왔었다.

 

-----복학--------

 

복학하자마자 유기화학을 재수강했다.

 

유기화학 교수님은 워낙 성격이 급하시고,

(말이 빠르시고 정신이 없었다.

화학식을 미친듯이 칠판에 막 그린뒤, "아 이러면 안되지. 침착해야지" 하면서 막 그린 분자식을 지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또한 자신만에 확고한 커리큘럼이 있어서, 교재순서는 무시하기 다반사였다.

그래서 홍길동처럼 200page를 보다가 정신 못차리면 어느새 500page로 넘어가있고 그랬다.

교재를 왔다갔다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90분 수업이 끝난뒤 나는 예전과 다르게 복습작업을 시작했다.

이렇게 복습을 해도 안 되면 진짜 내가 돌머리거나 화학이 나와 맞지 않는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시작했다.

 

선생님의 말이빨라 정신없이 받아적은 탓에 1주일 뒤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필기가 더러웠다.

나는 복습을 통해 선생님의 강의 언어를 내 언어로 만들어 이해하려했다.

 

90분 수업하나를 정리하다보면 처음에는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예전처럼 편하게 벼락치기 하면 되지 왜 이짓거리를 하고있나? 한숨만 나왔다.

 

특히 가장 괴로웠던 것은

200page, 500page, 800page등으로 사방팔방 옮겨다닐때마다 모르는게 수도없이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복학생에겐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교수님은 사례하나를 짧게 언급하고 넘어간것이지만, 그 사례가 왜 나왔는지 맥락을 파악해야했기 때문에 교재 앞뒤를 읽어봐야했다. 그래서 이해하는데 시간이 엄청 많이 소모되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신기하게도 정리하는 시간이 줄었다.

이것저것 많이 건드리는 강의방법을 하신탓에 

교수님이 중복되는 것을 많이 언급해서 복습시간에 쓰이는 시간이 조금씩 줄었다.

 

결과물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교수님은 내 이름을 외웠고 내 시험지를 교수실 앞에 게시하기도 했다. 

(D를 줬던 그 학생인줄은 지금도 모르실듯 하다.)

 

---

나는 유기화학에 흥미를 느꼈다. 하나의 원리만 알면 여러반응을 똑같은 메커니즘으로 설명할 수 있다.

굉장히 간편하게 느껴졌다. 화학을 더 공부한다면 유기화학자가 되어야하지 않을까란 생각도 했다.

 

지난 날 머리가 돌이거나, 적성/흥미가 안 맞는 것같다는 생각은 내 좁은 우물안에서 내려진 멍청한 결정이었다.

나는 이렇다할 노력도 해보지 않고 그 안에서 판단하려 했다.

 

오히려 반대로 그렇게 증오했던 유기화학이 공부를 하고보니 흥미로운 것으로 변해있었다.

 

 

--------현재---------

 

어찌어찌하다보니 유기화학을 안하고 과학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또 어찌어찌하다보니 어느덧 수료까지 했다.

누군가 과학철학이 너에게 맞느냐/재밌느냐고 묻는다면

D를 맞고 고민하던 과거의 나처럼 재미있다/재미없다라고 쉽게 결단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재미있다/재미없다를 말하려면 그 안에 깊게 빠져봐야안다.

그안에 푹 빠지고 나서야 흥미있다/없다를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든다.

 

나는 천성이 게으른탓에 남들만큼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가 배우는 것에 대해 

함부로 쉽게 재미없다/재미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내가 그런자격을 갖고 있는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

 

 

'그렇고 그런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레파스  (0) 2016.08.21
오늘의 일기  (0) 2016.08.05
공약불가능성  (0) 2016.07.30
본모습  (0) 2016.07.01
맞춤형 보육  (0) 2016.06.22
Posted by 정원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