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 3학기 때였다.

과학철학 전공자 메일이 도착했다. 

쿤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번역했는데, 번역본을 읽고 교정을 해주실 분을 부탁드린다는 메일이었다.

 

교정작업으로 인해 바쁜 겨울방학이 될 것이 분명했다.

다가오는 겨울방학에 하고싶은 공부도 있었고, 여행같은 자유롭고 즐거운 활동도 하고 싶었다. 

문득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공부하는게 내 논문에 무슨 도움이 될까?'란 생각도 들기도 했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와드려야 겠다'라고 생각했다.

당시 내 실력에 회의감이 많았지만, '어색한 문장 정도는 잡아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겨울방학에 영어 문헌과 번역본을 비교하였다. 의외로 시간이 많이 들었다. 

이듬해 봄, 선배로부터 출판된 책,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받았다. 감사의 글에 내 이름이 보였다. '어색한 부분을 지적해주었다'고 씌여있었다. 감사함과 뿌듯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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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 4학기를 마쳤다.

석사 논문 주제도 아직 찾지 못한 상태였다. 주제를 찾아야했다. 나는 집 앞 독서실에서 공부했다.

그 날도 주제를 못 찾아 여전히 방황 중 이었다. 석사 과정 2년 동안 못찾은 것을 하루 아침에 찾을 리 없었다.

 

무척 우울하여 기분 전환 삼아 아무 책이나 집었다.

선배가 준 <코페르니쿠스 혁명>이었고, 마침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대한 선배의 생각이 궁금하여 역자 해설울 읽었다.

나는 이 해설을 읽던 중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 혁명 과정은 쿤의 도식과 다르다"는 구절이 보였다.

 

"앗! 어쩌면 파이어아벤트에게?!" 

뭔가 해볼 수 있겠다는 느낌이 왔다. 형광펜으로 빡빡 밑줄을 쳤다.

 

바로 그 날 나는 선배로부터 관련 논문을 메일로 받았고, 이 후 석사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선생님으로부터 기대 이상이라는 과분한 칭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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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코페르니쿠스 혁명> 교정 작업을 도와드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확실한 것은 <코페르니쿠스 혁명> 교정 작업이 내 석사 논문에 무척 큰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이 교정 작업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라는 당시 나의 생각은 근시안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미래를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무척 오만한 행위이다.

작은 행위(선행/악행)가 어떠한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는 함부로 예단할 수 없다. 

설령 나를 스쳐가는 사람/일이라 해도 미래에 어떻게 만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것들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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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선배님과 나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연구하고 있다. 

선배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석사 논문 아이디어도 더 정교하게 발전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내 작은 행위가 불러온 또 다른 행운이다. 

나는 이 연구를 최선을 다해 진행할 것이다. 나는 작은 행위가 불러온 또 다른 행운을 놓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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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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