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여론재판의 ‘독’
김종훈 사회부장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인 멜레투스 등의 고발로 독배를 들고 죽음을 맞이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가 통치권을 장악한 뒤 수천명을 죽이거나 추방한 것을 두고,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하게 만들었다”며 선동한 결과였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은 고발자의 의도대로 흘러갔고, 배심원들은 유죄 평결을 내렸다.
15세기 영국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프랑스를 구한 잔 다르크는 콩피에뉴 전투에서 포로가 된 뒤 ‘마녀다’ ‘남장을 했다’ 등 혐의로 종교재판에 회부됐고, 1430년 화형에 처해졌다. 잔 다르크는 전투에 나서기 전 신학적 검증을 받은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남장을 한 이유도 적진 속을 여행하는 동안에는 시종의 옷을, 전투 중에는 갑옷을 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정치적 술수와 왜곡된 진술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소크라테스와 잔 다르크의 속절없는 죽음의 뒤에는 대중을 기만하는 이른바 ‘여론 재판’이 자리한다.
2007년 3월, 필자의 미국 연수 때 일이다. 한 국내 방송사는 ‘공무원 해외연수 실태’를 파헤치기 위해 미주리주 컬럼비아시를 방문했다. 두 달 뒤 방송은 “해외연수 공무원들이 공부는 뒷전인 채 허구한 날 골프만 즐긴다”고 질타했다. 방송은 허술한 평가제도의 문제점, 해외연수제도의 허실 등도 다뤘다. 이를 본 시청자 대부분은 “욕 먹을 만하다”며 혀를 찼다. 들끓는 비난 여론 때문인지 대통령 직속 중앙인사위원회는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보도 내용은 모두 ‘사실의 영역’에 있다. 그러나 방송이 놓친 것들이 있다. 당시 컬럼비아시에서 연수 중인 중앙부처 및 지자체 공무원 60여명 중 40여명은 필자가 공부하던 미주리 대학 ‘ㄱ센터’ 연구생들이다. 수업은 하루 4시간·학기당 16주, 연간 32주로 짜여졌다. 매월 1차례 미국 내 공공기관을 견학하고, 숙제와 프레젠테이션(발표)도 해야 했다. 이들이 수업에 빠지는 일도 드물었다. 이들이 골프를 즐긴 것은 골프만큼 ‘값싼 운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컬럼비아시는 두 곳의 대중골프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를 1년 동안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회원권 가격이 우리 돈으로 50만원이 채 안됐다. 국내서 헬스클럽 다니듯, 골프장을 다닌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서면경고’라는 징계를 받아야 했다.
캔들 코피의 <여론과 법, 정의의 다툼>을 옮긴 권오창 변호사의 말을 빌리면, 여론재판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은 사라진다. 증거절차를 거치지 않은 유죄추정의 논거들이 나라 전체를 논쟁에 빠뜨린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에 여론재판 광풍이 불고 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 채동욱 전 검찰총장 혼외 자식 논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폐기 등 ‘유죄추정의 주장·폭로’가 난무하고 있다. 이 사건·논란들에 공통점이 있다. 현 정권이 곤혹스러운 처지에 있을 때 터져나왔고, 그때마다 현 정권에 대해 제기되던 화두들은 묻혔다. 국가정보원의 18대 대통령선거 개입 및 정치 관여 혐의가 드러나자, 이석기 의원의 ‘5월12일 모임’ 녹취록이 공개됐다. 채 전 총장의 혼외 자식 의혹도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채 전 총장은 현 정권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채동욱 검찰’은 국정원의 대선 개입 및 경찰의 봐주기 행태를 드러내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 등을 법정에 세웠다. 이 수사는 ‘108만표 차이 대통령’을 창출한 현 정권의 정당성을 훼손할 수 있는 민감한 것이다. 채 전 총장을 내쫓기 위한 ‘일’은 짜여진 각본처럼 진행됐다. 여권 핵심부에서 “채 총장을 물러나도록 할 것”이라는 소리가 들렸고, 곧바로 조선일보의 보도가 나왔다. 혼외 자식이라는 흥미 넘치는 주제로 여론은 들끓었고 채 전 총장은 ‘쫓겨나듯’ 물러났다. 그리고 국정원의 대선 개입 및 경찰의 축소·은폐 의혹 사건은 세상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최근 현 정권을 위협하는 일이 또 제기됐다. ‘기초연금 후퇴’ 등 공약 파기에 대한 비판여론이다. 그러자 청와대와 여권은 검찰이 발표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중간수사결과를 앞세워 ‘사초(史草) 폐기다’ ‘NLL(북방한계선) 포기 발언을 했다’ 등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부관참시’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회의록은 국정원에도 있고, 봉하 e지원에도 남아있다. “초안을 삭제했다면 위법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종이문서인 초안은 최종본이 보고되면 정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도 있다.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되지 않은 것도 “후대의 대통령들이 읽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검찰의 설명을 보면, ‘통치행위’로 볼 수도 있다. NLL 포기 발언에 대해서도 어떤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비무장지대(DMZ) 평화공원 조성과, 노 전 대통령의 서해평화협력지대가 뭐가 다른가”라고 묻는다.
여론재판이 횡행하면 사회 전반에서 ‘사실에 입각한 판단’은 뒤로 물러선다. 그만큼 사회는 후퇴하고, 역사는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사회가 딱 그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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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훈 사회부장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인 멜레투스 등의 고발로 독배를 들고 죽음을 맞이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가 통치권을 장악한 뒤 수천명을 죽이거나 추방한 것을 두고,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하게 만들었다”며 선동한 결과였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은 고발자의 의도대로 흘러갔고, 배심원들은 유죄 평결을 내렸다.
15세기 영국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프랑스를 구한 잔 다르크는 콩피에뉴 전투에서 포로가 된 뒤 ‘마녀다’ ‘남장을 했다’ 등 혐의로 종교재판에 회부됐고, 1430년 화형에 처해졌다. 잔 다르크는 전투에 나서기 전 신학적 검증을 받은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남장을 한 이유도 적진 속을 여행하는 동안에는 시종의 옷을, 전투 중에는 갑옷을 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정치적 술수와 왜곡된 진술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소크라테스와 잔 다르크의 속절없는 죽음의 뒤에는 대중을 기만하는 이른바 ‘여론 재판’이 자리한다.
보도 내용은 모두 ‘사실의 영역’에 있다. 그러나 방송이 놓친 것들이 있다. 당시 컬럼비아시에서 연수 중인 중앙부처 및 지자체 공무원 60여명 중 40여명은 필자가 공부하던 미주리 대학 ‘ㄱ센터’ 연구생들이다. 수업은 하루 4시간·학기당 16주, 연간 32주로 짜여졌다. 매월 1차례 미국 내 공공기관을 견학하고, 숙제와 프레젠테이션(발표)도 해야 했다. 이들이 수업에 빠지는 일도 드물었다. 이들이 골프를 즐긴 것은 골프만큼 ‘값싼 운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컬럼비아시는 두 곳의 대중골프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를 1년 동안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회원권 가격이 우리 돈으로 50만원이 채 안됐다. 국내서 헬스클럽 다니듯, 골프장을 다닌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서면경고’라는 징계를 받아야 했다.
캔들 코피의 <여론과 법, 정의의 다툼>을 옮긴 권오창 변호사의 말을 빌리면, 여론재판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은 사라진다. 증거절차를 거치지 않은 유죄추정의 논거들이 나라 전체를 논쟁에 빠뜨린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에 여론재판 광풍이 불고 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 채동욱 전 검찰총장 혼외 자식 논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폐기 등 ‘유죄추정의 주장·폭로’가 난무하고 있다. 이 사건·논란들에 공통점이 있다. 현 정권이 곤혹스러운 처지에 있을 때 터져나왔고, 그때마다 현 정권에 대해 제기되던 화두들은 묻혔다. 국가정보원의 18대 대통령선거 개입 및 정치 관여 혐의가 드러나자, 이석기 의원의 ‘5월12일 모임’ 녹취록이 공개됐다. 채 전 총장의 혼외 자식 의혹도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채 전 총장은 현 정권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채동욱 검찰’은 국정원의 대선 개입 및 경찰의 봐주기 행태를 드러내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 등을 법정에 세웠다. 이 수사는 ‘108만표 차이 대통령’을 창출한 현 정권의 정당성을 훼손할 수 있는 민감한 것이다. 채 전 총장을 내쫓기 위한 ‘일’은 짜여진 각본처럼 진행됐다. 여권 핵심부에서 “채 총장을 물러나도록 할 것”이라는 소리가 들렸고, 곧바로 조선일보의 보도가 나왔다. 혼외 자식이라는 흥미 넘치는 주제로 여론은 들끓었고 채 전 총장은 ‘쫓겨나듯’ 물러났다. 그리고 국정원의 대선 개입 및 경찰의 축소·은폐 의혹 사건은 세상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최근 현 정권을 위협하는 일이 또 제기됐다. ‘기초연금 후퇴’ 등 공약 파기에 대한 비판여론이다. 그러자 청와대와 여권은 검찰이 발표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중간수사결과를 앞세워 ‘사초(史草) 폐기다’ ‘NLL(북방한계선) 포기 발언을 했다’ 등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부관참시’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회의록은 국정원에도 있고, 봉하 e지원에도 남아있다. “초안을 삭제했다면 위법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종이문서인 초안은 최종본이 보고되면 정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도 있다.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되지 않은 것도 “후대의 대통령들이 읽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검찰의 설명을 보면, ‘통치행위’로 볼 수도 있다. NLL 포기 발언에 대해서도 어떤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비무장지대(DMZ) 평화공원 조성과, 노 전 대통령의 서해평화협력지대가 뭐가 다른가”라고 묻는다.
여론재판이 횡행하면 사회 전반에서 ‘사실에 입각한 판단’은 뒤로 물러선다. 그만큼 사회는 후퇴하고, 역사는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사회가 딱 그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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