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3년전 이맘때
몽골 봉사활동을 갔더랬다.
---회상---
신문참고.
http://www.donggukin.org/news/articleView.html?idxno=242908
본인은 9시 방향에 위치해있다.
아 몽골.
분명 블로깅을 하고있었을때였을텐데
글이 없었던 것이 아쉽다.
우선
나는 한국어 팀이었던 것같고
나무심기팀이었던 것같고
흐음. 기억안남.
대체 나는 블로그만 개설하고 뭘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한탄은 뒤로하고
이래서 일기가 중요하구나.
일단 아는것부터 차근차근 가보자.
그럼 시작해 볼까?
우선 몽골을 부를때 몽고라고 해서는 안된다.
몽고는 중국에서 얕잡아부르는 표현인데,
몽고(夢古): 옛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놈들이라고 비하하는 표현이다.
발음도 똑같으므로 몽골인에게 몽고라고 하면 실례....
과거 역사부터 한일관계처럼 몽골과 중국간의 관계는 좋지않다.
원래 몽골은 땅이 컸다. 그러니까 외몽골과 내몽골을 합한 영역인데
청나라시절에 내몽골을 무력으로 빼앗아갔다고한다. 몽골의 1/3에 해당하는 영토니 반감이 컸을것이다.
그들은 징기스칸을 정말 자랑스러워한다.
그것을 여러가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격에 상관없이 모든 지폐도 징기스칸, 공항도 징기스칸, 백화점도 징기스칸,
동상도 징기스칸
징기스칸의 나라라고 보면된다.
울란바토르 시내 자체는 인구밀도도 많고 엄청 번잡한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게 끝
몽골은 남한보다 8배큰데도 불구하고
몽골영토에 사는 인구는 저 영토에 200만명밖에 안된다.
차타고 20분정도 나가면 아무것도 없고 정말 초원뿐이다.
울타리 박고 내땅이라 우기면 그러려니 할 것같은 기분.
우리가 묵었던 숙소는 lotus 게스트하우스이다.
뜨거운 물도 나오다말다하지만, 거기에서는 나름 굉장히 좋은 숙소였던 것같다.
This photo of Lotus Guesthouse is courtesy of TripAdvisor
인솔자님이 몽골치안을 안심할 수 없다고 못나가게 했기때문에
자유시간 내내 숙소에 있었고, 마피아게임만했다.
몇가지 신기한것
1. 한국사랑
몽골인들은 한국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것같다. 한국을 몽골어로 솔롱고스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무지개의 나라를 뜻한다. 한국을 무지개의 나라로 생각한다니 감동.
몽골 울란바타르에는 서울의 거리가 있다. 서울의 거리는 몽골내에서 번화가이다.
물론 서울에 울란바타르의 거리는 없다.
몽골국립박물관에 갔다. 고려는 몽골의 (사위나라) 부마국이었다.
박물관에서 점령한 영토를 보여주었는데 고려는 빠져있었다.
중국처럼 역사왜곡을 하지않아 놀랬던것은 사실
한국중고차가 많다. 몽골인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한다.
간혹 버스를 보면 한글이 붙어있는채 다니는 버스를 볼 수 있다.
몇가지 몽골버스 사진을 소개하겠다.(인터넷에만 쳐도 나오긴한다.)
몽골 주민은 이 버스가 어디가는지 어떻게 아는걸까?
우리나라가 아니다...;;;
왜 한글을 안떼는 걸까? 귀찮아서 그런건줄 알았다.
그러나 아님!
그 이유는 한글이 너무나 예뻐서라고 한다. 한글이 미적으로 너무 아름다워서
떼지 않는 거라고 한다. 심지어 민방위가 써있는 모자도 멋지게 쓰고다니기까지 한다.
우리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하는 몽골사람들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몽골 안내자분의 말로는 한국인에 엄청 우호적이었지만,
지금은 약간 흉흉하기도 한다고 한다. 한국인이 순진한 몽골인을 상대로 등쳐먹는 일이 많아서.
한국에 돈벌러왔다가 돈 하나 받지 못하고 돌아온사람이 많다고 한다 .
안타까움..
아 그리고
몽골에 온 한국인이라면 이태준 의사의 묘를 찾길 바란다.
이태준의사(1883~1921)는 24살때 세브란스에 입학하여 1911년 6월 2회로 졸업생으로 나왔다. 총 6명이었다.
그는 안창호의 권유를 받아 청년학우회에 가입했다. 이태준 선생은 나라를 구하고자 중국으로 망명하기로 했다.
이어 김규식의 권유로 몽골에 가서 병원을 개원했다. 김규식은 몽골에 독립군 장교양성소를 만드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인연으로 이태준은 뒷날 김규식의 사촌여동생인 김은식과 결혼했다.
몽골에서 이태준은 돈을 모아 독립단체에 돈을 보냈고, 의사로서 몽골인을 돌보기도 했다. 그는 몽골인 임금의 주치의를 했고, 당시 몽골사람들에게 심했던 매독을 치료하여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는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의 군대가 들낙이며 혼란을 거듭하던 몽골을 떠나지 않고 인술을 베풀며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울란바토르에서 누군가가 쏜 총에 맞아 38살에 사망했는데 그것에 대해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몽골 울란바타르 시내에서 남쪽으로 얼마 안가면 이태준 의사의 묘를 찾을 수 있다. 연세대는 몽골정부에서 2천여 평의 땅을 얻어 그곳에 그의 기념공원을 세우게 된다.
몽골의 대학생들과 이야기한적이 있다.
몽골의 대학에서는 한국어 학과도 큰 인기다. 대장금을 엄청 좋아한다.
몽골사람들이 이렇게 한국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
이태준 의사의 공로를 어느정도 생각해야 할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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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지 1시간 이제 그만 놀아야겠다.
반응이 좋으면 다음에 연재
반응이 안좋아도 다음에 연재
그럼 이 곡으로 마무리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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