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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8.23 러셀, 행복의 정복, 4장 - 인생의 끝, 권태- 정리

러셀의 <<행복의 정복>> 4장에서 러셀은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는 자극을 버리고, 조용하게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조용하고 단조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지루해보이지만 지루함(권태)을 견디는 힘이 행복한 삶의 필수 조건이라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 결론을 내린 것일까?

나는 논문을 쓰고 연구를 해야하는 대학원생이다. 논문을 쓰고 공부하는데 가장 힘든 것은 지루함, 외로움, 즉 권태를 견디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점에서 러셀의 주장은 어떠한 답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뿐만 아니라 러셀의 생각은 외로움, 고독함을 느끼는 현대인에게도 분명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이를 정리하여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요약 시작-----------

권태(지루함)은 인간 특유의 감정이라고 여져진다. 짐승들은 권태와 비슷한 것을 느낄 겨를이 없다. 적을 경계하거나 먹이를 찾는일, 짝짓기 등에 노력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권태의 반대는 즐거움이 아니라 자극이다. 평소와 다른 일(자극)이 생긴다면 얼마든지 권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적으로부터 도망치거나, 사형당하는 순간을 생각해보라. 매우 불쾌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권태를 느끼지 않는다.

수렵 채질 시절에는 권태를 느끼지 않았다. 동물을 추적하는 것, 전쟁, 구애 역시 자극적이었다. 원시인은 옆에 잠든 남편 옆에 누운 여자와 정을 통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결코 권태롭지 않다.

하지만, 농경 사회로 접어들면서 삶은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저녁 식사가 끝나면 가족들이 둘러앉아 시간을 보냈다. 이후 아버지는 잠들고,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고, 딸들은 '죽거나 딴 곳에 가버렸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에 잠겼다. 딸들은 책을 읽을수도 없고 방을 나올 수도 없었다. 중세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사람들은 글을 읽고 쓸 줄도 몰랐다. 방 안의 촛불만이 어둠을 밝히고, 길은 통행이 불가능한 상태이기에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 생활은 지루했기에, 마녀 사냥만이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유일한 소일거리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떠한가? 오늘날 사람들이 겪는 권태 정도는 이전보다 덜하지만, 권태에 대한 두려움은 훨씬 깊다. 현대인들은 권태를 피하기 위해(=자극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가령, 사람들은 자동차 혹은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타고 영화를 보러간다. 집집마다 라디오, TV가 있고, 젊은 남녀가 만나는 것도 이전에 비하면 상당히 쉬운 일이 되었다. 

사회적 계층이 높을수록 점점 강렬한 자극을 추구하게 된다.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춤을 추고 술을 마시며, 부자들은 권태로울 새 없는(지루할 새 없는) 삶을 이상으로 여긴다. 나[러셀]는 이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러한 이상을 달성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전날 밤의 즐거움이 클수록 아침의 권태는 더 깊어지게 된다. 결국 중년이되고, 노년이 될 것이다. 

권태는 인생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로서, 전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자극이 지나치게 많은 삶은 밑 빠진 독이나 다름없다. 많은 자극을 바라는 사람들은 환희에 가까운 감격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점점 더 강력한 자극을 찾을 수밖에 없다. 가령, 후추를 병적으로 좋아해서 남들이 보기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많은 후추를 먹어도 본인은 별 맛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과 비슷하다.

지나치게 많은 자극은 건강을 해칠뿐만 아니라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즐거움이 점차 무뎌지게 된다. 나[러셀]는 자극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그 양에 있다. 자극이 너무 많으면 심신을 황폐하게 한다. 그러므로 권태를 견딜 수 있는 힘은 행복한 삶에서 필수적이다. 

아무리 훌륭한 소설이라도 지루한 부분이 있고, 훌륭한 위인들의 삶 역시 결정적인 몇 부분을 제외하고 흥미거리가 없다. 칸트는 평생 동안 쾨니히스베르크에서 16킬로미터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고, 다윈은 세계일주를 한 뒤 남은 생애를 자신의 집에서 보냈다. 마르크스는 몇 차례의 혁명을 선동 한 뒤 여생을 대영 박물관에서 보냈다. 전체적으로 조용한 삶이 위인들의 특징이며, 위인들이 누렸던 기쁨은 외부인의 입장에서 결코 흥미롭게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단조로운 삶을 견디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요즘 부모들은 이 점에서 비난 받아야 한다. 요즘 부모들은 영화, 음식 같은 자극적인 오락거리를 너무 많이 제공한다. 부모들은 아이가 날마다 비슷한 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지 못한다. 어린 아이는 단조로운 삶 속에서 스스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오락 거리를 자주 제공하거나 지나치게 다양한 인상(잦은 여행, TV 등)을 심어줘서는 안된다. 이런 아이들은 어떤 성과를 얻기 위해서 반드시 견뎌야 하는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어른이 될 수도 있다.

지루함이 유익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루함을 참아내지 않고는 뛰어난 성과를 거둘 수 없다. 가벼운 흥밋거리나 오락에 빠져있는 젊은이에게 건설적인 목적이 들어가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 젊은이의 관심은 멀리 있는 목적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즐거움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비유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써보자면, 우리는 대지의 창조물이며, 우리의 생명은 대지의 생명의 일부분이다. 대지의 생명의 흐름은 매우 더디다. 대지에게는 봄과 여름 만큼, 가을과 겨울이 중요하다. 즉, 활기찬 활동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평온한 휴식도 중요하다. 인간은 수 세기에 걸쳐 대지의 생명[정리자: 자연 or 자연물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과 접촉해왔다. 대지의 생명[각주:1]과 접촉하는 것은 특히 어른보다 아이에게 중요하다. 

런던에만 살다가 처음으로 시골 초원에 간 일이 있다. 당시 겨울이었고 모든 것이 축축하고 진흙투성이었다. 어른들이 보기엔 흥미 없었으나, 두 살배기 아이는 황홀감에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 아이는 땅바닥에 앉아 얼굴을 풀속에 묻었다. 아이가 가졌던 이러한 황홀감은 매우 근원적인 것이다. 

반면, 오늘날의 쾌락 중에는 대지와 접촉할 여지가 없는 것들이 많다. 좋은 예로는 도박이 있다. 도박을 통한 쾌락이 끝나자 마자, 그 사람은 답답함, 불만, 허기를 느낀다.  반대로 대지와의 접촉은 깊은 충족감을 준다. 물론 이로 인한 쾌감은 자극적인 오락에 비하면 훨씬 약할 수도 있지만, 쾌락이 끝난 뒤에도 지속적으로 남아 있다. ex) 셰익스피어 서정시에도 두살 먹은 아이가 느낀 것과 같은 기쁨이 가득 넘치고 있다. "들어라, 종달새의 소리를Hark, hark, the lark", 혹은 "여기 노란 모래밭으로 오라 Come unto these yellow sands"같은 시를 생각해보라. 자연과의 혼연일체로 인한 황홀감이 세련되게 표현되어 있다. 

사랑 vs 애정 없는 성관계를 생각해보자. 사랑의 경우 가뭄 끝의 단비로 식물이 되살아나듯이 활력을 불어놓고, 우리를 새롭게 한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성관계의 경우 순간적인 쾌락이 있지만, 끝난 후 피로감, 혐오감, 공허감만 남는다. 사랑은 대지의 일부이지만, 사랑이 없는 성관계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현대인들이 느끼는 권태는 대지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대지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삶은 갑갑함, 답답함을 가져온다. 돈이 많은 부호들은 권태를 두려워하여, 자극을 추구하려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더 나쁜 권태에 빠지고 만다. 

행복한 인생이란 대부분 조용한 인생이다. 진정한 기쁨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만 깃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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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위의 꽃, 나무, 나비, 밝게 비치는 태양 빛 등 [본문으로]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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