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음 사진은 두꺼비가 지네를 잡아먹는 사진이다.

EBS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제목은 "지네"

지네가 혐오스러워 보이기 때문에 잘 연구하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가 모르는 이면의 모습이 많으며 우리도 잘 모르기 때문에 여러가지를 알아보자는 취지 였다.

지네에 관해 여러가지를 알 수 있었지만,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바로 지네와 두꺼비가 나오는 이 부분!

 

 지네는 더듬이가 무척 민감하다. 더듬이로 앞을 나아간다. 더듬이에는 여러 털들이 있어 작은 것 하나하나 까지 알 수 있다. 그런 좋은 더듬이를 가졌기 때문에 눈이 필요없다. 어둠속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눈보다 더듬이가 더 유리했을 수 있다. 그래서 지네는 더듬이가 엄청 발달하고 눈은 원시시대정도로 퇴화하였다.

 지네는 더듬이에 거의 의존한다. 하지만 그것을 커버할 정도로 더듬이가 무척 발달했다. 그런 완벽한 더듬이를 가진 지네는 기어다니는 벌레중에서도 최강이다. 도마뱀을 마비시키고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치사량이 높은 독을 가지고 있고, 날카로운 이빨또한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지네도 두꺼비에게 만큼은 힘도 못쓴다. 왜 천적관계일까? 영상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지네가 있다. 지네가 지나간다. 그런 지네를 두꺼비는 노려보고 있다. 하지만 지네는 두꺼비의 존재를 알지못한다. 지네의 더듬이가 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지네는 어이가 없게도 두꺼비에게 점점 다가갔다. 두꺼비는 지네가 가까이오자 1/1000초만에 지네를 물어버렸다. 지네는 손도 쓸 수 없었다.

 

 지네는 더듬이가 닿지 않는 범위내에서 자신은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즉, 더듬이 범위안에서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자신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네는 자기딴에는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자신의 주위범위밖에 보지 못한다. 하늘에 뭐가있건 앞에 뭐가있건 간에 더듬이 범위까지 밖에 모르는 것이다.

 결국 지네는 더 멀리본 두꺼미에게 당하고 말았다. 두꺼비는 그런 지네를 처음부터 끝까지 물끄러미 보고 타이밍만 노렸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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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간세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한다. 어떤 사람은 좁은 시야만으로 자신은 모든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열심히 노력한다지만 남들보다 뒤쳐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시야의 차이 아닐까?

 크게보면 작은 일인데 그것에 목숨을 걸고, 그런것에 고민하여 시간을 빼앗겨서, 타인이나 자기 자신을 억압해온것은 아닐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시야를 기르는 방법에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 어떻게 하면 두꺼비처럼 넓게 볼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방법은 바로 철학이다. 왜 그런것인지 이유에 관해 찾고, 내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내가 왜 존재하는 지에 관해 생각하면서 시야를 넓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삶이 우리를 조금 더 넓게 보는 눈을 제공할 것이다.

 결국 뻔한 말들이 반복되고 있지만, 책이 참 중요한 것같다. 우리는 살면서 훌륭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기회를 갖는 다는 것은 참 어렵다. 이때 책은 우리가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나마 들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남의 말을 온전히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글을 읽고 생각할 기회를 갖는 다는 것이 큰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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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아가 생각해 본다.

개미는 일차원에서 산다. 개미는 더듬이로서 자신이 가야할 길밖에 모른다. 대열을 따라 걸어갈 뿐이다. 어느순간 그 대열에서 멀리 낙오되는 순간 개미는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기어다니는 동물은 2차원에서 산다. 그들에게는 하늘이 없다. 위라는 개념이 없이 오로지 기어다니는 땅으로서 생각된다. 나무위를 올라가도 그들은 그것을 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나, 인간을 비롯한 다른 동물은 3차원에서 산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들은 위라는 존재를 안다. 위에서 생활하는 시도를 한다.

우리는 3차원에서 살고있다. 우리는 우리들이 살고있는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이상의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 마치 개미처럼 말이다. 그럼 이 사고를 계속 적용해보았을때, 우리가 모르는 다른 차원이 존재하고 있을까? 즉, 우리는 이 세계에 살고 있지만, 다른 앞선 차원의 사람이 보기에는 그 세계밖에 아는 동물로 인식되는 앞차원의 존재가 있을까?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신일까? 신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궁금하다.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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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인근이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세상이 제어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도 빨리 변하고 있다."
이 친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사회의 결과를 예상 할 수도 없고, 해결책을 제시하기에는 너무나 늦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미래사회의 변화양상을 알고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하는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철학은 미래사회에 반드시 필요하다. 여러사람 혹은 매체를 통해 이말을 참 많이 들었다.
직관이란... 생각의 도약을 통해 결론을 빨리 내리는 것인데,
직관을 사용해보자면(자료를 찾고 여러가지 증거를 찾는건 너무어렵고, 번거롭다.)
앞으로의 21세기 사회는 유비쿼터스, 즉 컴퓨터(인공지능)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형태가 될것이며, 미래의 인류는 나 자신 그리고 인간에 관해 알고싶어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내비게이션 컴퓨터 핸드폰만 봐도, 우리가 기계에 얼마나 종속되어있는지...알 수있지 않는가.
미래는 더 심각해 질 것이다. 그러기에 철학은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왜?? 왜왜왜???
미래에 철학이 반드시 필요하냐고 하면..설명하기 어렵다.
직관자체로는 증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납득할 만한 설명이 필요하다.

어떠한 과정으로 인하여 이것이 반드시 필요한지 충분한 설명이 필요한것이다.

철학이 답이라고 생각한다면 (내 직관을 나는... 200%믿는다)
내 경우에는
이것은 답은 알지만 과정을 모르는 문제풀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에는 두가지가 있다.
답을 배제한 상황에서 단지 문제의 단서만으로 푸는것.(철학배제)
둘째는 답을 알기때문에 역으로 추론해나가는것.

첫번째 같은 경우는 앞으로의 사회가 어떻게 변할지 추론을 해서 왜 철학이 필요하게 되었는지 인과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너무도 어렵다. 사회가 빨리 변하지 않는가...추론하기 어렵다.
철학이 답이라는 것이 확실하다면 역으로 추론을 통해 알아내는 것이 정보를 최대한 많이 이용하는 것이므로 더 수월하다.
그뜻은 철학에 대해 (답에 관하여) 더 깊이 공부하고, 이것이 왜 시대에 필요한지 알아내는 것이 더 수월하고 쉬운방법이라고 할 수있다.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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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적인 문필가 타입
| 센스, 감성, 열정
동물적 감각+논리적 이성까지 겸비한 당신은 욕심쟁이, 후후훗! 감각과 동시에 ‘쓰임’까지 고려하는 섬세함을 가진 당신. 동물적 감각을 중시하지만, 이 감각은 명확한 데이터를 토대로 나오는 것이다. 좋아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센스쟁이 타입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동물적 감각과 함께 빛나는 통찰력까지 가지고 있으니 어디 가서 미움 사기 십상인 타입+_+? 현대의 직업군에서 꼽자면 ‘디자이너’ 혹은 ‘설계자’에 가까운 이 부류의 철학자는? = 흄, 들뢰즈, 마르크스, 아감벤
『철학 vs 철학』에서는?
8장 어느 경우에 인간은 윤리적일 수 있는가? 흄과 칸트
15장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헤겔과 맑스
26장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 중 어느 것이 중요할까? 데리다와 들뢰즈
28장 정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슈미트와 아감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동시에 유명한 회의주의자.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의외로 흄이 애덤 스미스의 절친이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또 한 가지, 그가 '회의주의자'가 된 이유는 '시니컬'하거나 '허무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어쩌면 그는 단순히 광대하게 펼쳐진 우주 앞에서 지적 겸손함을 보일 줄 아는 사람일 뿐이었을 수도 있다. 그가 살던 당대에는 초월적인 신 없이 평화와 행복을 상상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아주 유쾌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친구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다가 죽어 갔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명성'에 꽤나 집착하는 태도를 보인 적도 있었는데, 결국엔 '이교도'라거나, '무신론자', '회의주의자'(이건 사실 꽤 모욕적인 표현이다)라는 악명을 얻었다. 하지만 후대에 칸트에 의해 정직한 사유가로 재평가되고, 들뢰즈에 의해 감각의 위대함을 보여 준 철학자로 높이 평가받았으니, 니체 말대로 "어떤 사람들은 죽은 후에야 다시 태어난다"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관련된 책]
맑스
20세기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사상가를 딱 한 사람만 꼽으라고 한다면, 거의 99%는 이 사람을 꼽을 듯. 적을 구워 먹어 버릴 것 같은 열정으로 글을 써 댔던 이 사람은 '천재'였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정말 놀랄 만큼 면밀한 분석을 수행했으면서도 문학적인 감수성은 단 한번도 포기하지 않는다. 맑스의 책들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꼼꼼하고 정밀한 분석은 단순히 똑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테지만, 그걸 가지고 심장을 쿵쾅거리게 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인류 역사 전체를 살펴도 손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맑스의 일상은 가끔 '혼돈 그 자체'였다고 한다. 가장 수입이 적을 때조차 당대의 중산층에 상응하는 정도였는데, 지출의 무능력과 사치로 인해 먼저 죽은 딸의 관조차 장만할 수 없었다고 한다. 생활에서도 유능한 '천재'란 정말 없는 것인가?
[관련된 책]
들뢰즈
"그는 너무나 굳센 나머지 실망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이 허무주의적인 세기말에도 그는 긍정적이었다. 질병과 죽음에도 역시. 왜 나는 과거에 그에 대해서 떠벌렸던가? 그는 웃었다. 그는 웃고 있다. 그는 여기 있다. 슬퍼하는 건 너야, 멍청아. 그가 말한다." (들뢰즈의 죽음 이후 『르몽드』에 실린 리오타르의 추도문)
들뢰즈에 대해 그 자신의 발언을 제외하고, 이렇게나 그와 그의 사유를 잘 표현한 말이 있었던가? 긍정적 삶의 대가였던 들뢰즈는 그 어떤 '부정적인 것의 긍정성'도 용납하지 않았다. 부정적인 것은 그냥 부정적인 것일뿐 그로부터 긍정적인 무언가가 나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좋아하는 '반성'을 엄청나게 경멸한다. 반성은 우리를 위축시킬 뿐이다!
들뢰즈는 '글쓰기' 그 자체에 관해서도 아주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보통의 철학자들과는 다른 형식의 글쓰기 실험을 했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책은 '이해'할 수 없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낄 수'는 있다는 것이다! 깊은 밤 고원 위에서 별 밭을 우러르는 신비한 체험을 하고 싶을 때 그의 저서 중 아무 곳이나 펴 놓고 읽어 보길 바란다. 말들의 미로 속에서 오바이트하거나, 오만가지로 펼쳐지는 생각의 잔치를 볼 수 있으리라!
[관련된 책]
아감벤
'벌거벗은 사람들', 오직 생명 그 자체만 남은 사람들. 고대 그리스 철학의 개념들을 현대사회를 철학적으로 독해하는 데 활용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똑똑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것은 하나의 사태를 다른 것들과 연결하는 통합적인 상상력이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태생의 이 철학자는 그렇게 역사 속에 묻혀 있던 '호모 사케르'를 현대로 소환함으로써, 현재의 '호모 사케르'를 드러낸다.
방랑하는 사람들, 자격 없고 소속 없는 사람들을 통해 자유와 대안까지 그려 볼 수 있을까? 더 자세한 내용은 『철학vs철학』이나, 아감벤의 다른 저서를 보시길! 어쨌든 우리 삶에서 '정치'를 사고할 때 주목해야 할 철학자임에는 틀림없다는 사실!
[관련된 책]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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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천, 해탈, 공空, 무위
'무위'한다고 하여, '실천'과 등지라는 법은 없다. '무위' 자체가 실천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 타입의 사람들을 '무위의 실천가'라고 부를 수 있겠다. 세상을 관통하는 일관된 법칙은 없다. 세계는 변화무쌍, '변화' 자체가 천하의 도道이다. 그런 변화의 격랑을 마음대로 넘나들면서도 휩쓸리지 않는 지고한 자유인은 바로 이 타입의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다. 모든 존재를 향해 자신을 개방하라! 세계 만물, 각각에 우주가 들어있나니! 이 타입의 동양사상가는? = 싯다르타, 나가르주나, 장자, 원효
『철학 vs 철학』에서는?
2장 자아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아지타와 싯다르타
4장 도란 미리 존재하는 것인가? 노자와 장자
15장 깨달은 자가 바라보는 세계는 어떤 모습인가? 원효와 의상
18장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는 무엇인가? 장재와 주희
싯타르타
고타마 싯다르타는 모두가 알다시피 불교의 창시자인 붓다, 즉 석가모니이다. 그를 철학자로 볼 수 있을까? 사상사의 맥락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실천가'였던가? 역시 그렇게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 교리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싯다르타가 불교의 법을 설했던 이유도 중생들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랐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실천'에 관한 사상이 겨냥하는 것은 사실 모두 이것에서 비롯된다. 이 부류의 철학자들 중에서도 싯다르타만큼 이 분야에 있어 탁월한 결과를 만들어낸 사람은 없다.
[관련된 책]
장자
장자와 관련된 일화는 너무나 많다. 『장자』 자체가 이야기들의 묶음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장자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알고 싶다면 장자를 직접 읽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지만, 워낙 알쏭달쏭한 말들이 많아서 그 속에 담긴 결을 이해하려면 좋은 해설서도 한 권쯤 필요할 것이다. 장자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흔히 그의 사상을 '도피적'인 것으로 알고 있거나, '신선놀음'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데, 이것은 그에 대한 철저한 오해에 기인하는 것이다. 중국의 대동란기였던 춘추전국시대에 등장한 무수한 이론들처럼 그 역시 실천적인 이유에서 그의 사상을 전개시켰다. 부, 명예, 권력 등 단일한 척도에 의해 좋은 것으로 취급되는 것들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 그것을 통해 무위의 삶, 자유롭게 벗어나고 재구성되는 삶을 말한 그의 철학은 삶의 적극적인 방식을 말한 것이지, 삶으로 부터의 도피를 말한 것이 아니었다. 싯다르타와 더불어 이 계열의 철학자들의 대표격이라고 볼 수 있다.
[관련된 책]
원효
이렇게 이름 난 사람이, 신라왕실과도 일정한 관계가 있었던 사람이 '무위의 실천가'일 수 있을까? 그렇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사상사적인 맥락에 봤을 때 그의 사상은 충분히 그럴만 한다. 원효가 종국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깊은 사유, 폭넓은 지식이 아니었다. 그는 '생각과 논의조차 필요없을 정도의 실천'을 추구했던 사람이다. 그 유명한 해골물 이야기는 직관적으로 알고, 생각하기 전에 그것을 실천하고야 하는 그의 사상과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늘 민중들과 함께 춤추고, 희노애락을 나눴던 그의 면모를 만나보자!
[관련된 책]
장재
장재는 주희보다 약간 앞선 연대의 사람으로, 송나라 시대에 성립된 신유학에 결정적인 기초를 제공한 사람이다. 그는 유학자로서, 향후 유학이 어떻게 전개되어야 할지를 명확하게 주지하고 있었다. 당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강력한 세력을 확장해온 불교와 민간에 널리 전파되어 있는 도가 사상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유학에 미래가 없다고 본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그러한 자신의 생각에 오래전부터 중국에 전해진 전통적인 자연관, 즉 기의 흐름을 통해 세계의 유, 무가 나뉜다고 보는 견해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시대를 통찰하는 지혜와 정확한 판단력, 더불어 전통과 현대를 결합하는 상상력까지 ‘지성인’이 갖춰야 할 모든 덕목을 갖췄다고나 할까?
[관련된 책]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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