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니까 청춘이다." 너도 힘들지 청춘은 어둡고 힘들다 라는것.

힐링은 무엇인가? 본인이 힘들기 때문에 위로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왜 힘든가? 대체 왜?

 

결국 이러한 원인은 불평등 때문이다. 결혼이든 미래문제든 경쟁사회에서 경쟁이든말이다.

즉, 상처받는 원인은 경쟁사회에 따른 불평등으로 본다.

경쟁사회는 앞으로 더 심화될 것이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불평등은 더 심해지고 있다.

앞으로의 시대가 갈 수록 우리나라안 에서도 불평등은 더 심각해질 것이다.

그에따른 상대적인 박탈감은 더욱더 커질 것이다.

 

이에 따른다면,

문제를 느끼는 즉, 아파하는 청춘들은 가면갈수록 더욱 많아질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너도 힘들지"공감 하는 것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여기서 상황은 해결되지 않는다. 상황은 그대로이다.

고민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 힘들지만 다시 시작하자." 하면서 힘든 상황으로 다시금 자신을 집어넣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힐링 또한 노력을 부추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잠시 위로해 주는 척하면서 결국 노력, 경쟁으로 자신을 또 몰고가는 것이다.

이런점에서 힐링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상처의 아픔만 느끼지 못하게 하는 진통제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 또한 임시방편일 뿐 궁극적인 해결책으로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이 경쟁사회에서 우리는 힐링없이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자신의 삶의 문제를 관철해야 한다.

 

여러가지 삶의 문제가 있을것이다. 취업문제든 연애문제든. 미래에 관한 문제. 각박한 경쟁

결국 이것을 이겨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얼까?

경쟁을 위한 더 치열한 노력 or 이 경쟁을 장려하는 사회의 문제인가?

 

물론 자신의 개인적인 (능력의 부족이거나 삶의 태도의 탓) 문제로 볼 수 있지만

사회적인 구조적인 문제또한 바라봐야 할 문제다.

 

결국 삶의 문제를 관철할 때에는 개인 사회,양쪽의 관점에서 모두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힐링열풍은 사회적인 현상, 문제로 보는 관점을 갖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사회에서는

우리는 너무 개인적인 문제에만 치중해 왔다. 반대로 사회적인 문제에는 너무 관심이 없어왔다. 우리가 겪는 문제를 사회적인 구조를 통해 바라보는 것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해결책이라면?

결국 불평등이 원인이므로, 불평등으로 인한 상처를 최소화 해야한다.

불평등은 무조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누구는 열심히 일했으니 많이 가지고가고

누구는 노력을 안했으니 적게 가지고 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그것이 불평등으로 인한 상처를 정당화할 순 없다.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당연하다고 손가락질을 할 순 없다는 것이다.

장애인인 아이에게, 혹은 수학보다 다른 것에 재능을 보이는 아이에게, 운동을 못하는 아이에게, 분명 불평등은 존재하지만 이들에게 손가락질 하는 것은 수준낮은 행동이다.

결국 경쟁을 통해 우열은 가려지겠지만, 그것을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절대 정당화 할 수 있을까? 우열에서 열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있는 어떠한 내부적 상황 혹은 외부적상황 혹은 자라온 환경으로인해서 발휘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무수히 많다. 이런 경우 이런 사람들을 뒤쳐진다고 해서 우리가 멸시할 정당성을 갖는가?

없다면 또 멸시를 가져왔다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된다면 이러한 상처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가 공동체며 함께 살아가는 사회란 점을 끊임없이 인지하는 것이 이러한 불평등을 해소하는 첫 시작이라 생각한다.

 

 

가장 인상깊게 본 tv프로그램이 있다. 산에서 홀로사는 할머니를 위해 아들과 손녀손자가 땔감을 가지고 왔다. 모두 자신이 들 수 있을 만큼 들었다. 능력이 모자란다면 너는 왜 안되냐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불평등은 있어왔다.(원시인도 일잘하고 못하는 사람있다.)

항상 겪는 이러한 불평등에서 그것을 조금이나마 더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 진보한 사회이다.

 

평소 잘 지내왔다해도 어느 누군가가 잘 나가게 되면 우리는 그러지 못한다는 사실에 자책하고 질투하기도 하고 아파하기도 한다. 그전까진 문제점이 아닌것이 어느순간 문제점이 되고 마음의 문제로 생겨버린 것이다. 앞으로 사회가 불평등이 심화된다면 이러한 아픔을 가진 사람도 늘것이고, 이러한 문제는 더 큰 사회문제가 될 것이다. 이들에게 언제까지 경쟁에서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야하며 앞으로 나가야한다고 떠밀것인가?

분명 소득은 늘었는데 왜 더 행복하지 못한 것일까?

 

375회는 힐링에대해서 90분동안 떠들었지만 결국 이것의 본질적인 문제는 불평등이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라고 볼 수 있지만 사회(자본주의사회) 또한 불평등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당연히 생길 수 밖에 없는 불평등을 해결하려 노력하는 것이 좋은 사회이다.

결코 개개인의 문제로 치부해서 보기는 어렵다.  

 

정리하자면 힐링현상은 불평등이 심화된 현대사회에서 대두된 현상이라고 본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사람들이 힐링을 통해 자신의 부족 등의 개인적인 면으로서만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것은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시 힐링 후 경쟁사회에 돌아온다고 해도 언젠가 경쟁에서 괴로움과 힘든점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경쟁사회는 필수라는 점에서 개인적인 문제또한 분명 고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적인 구조속에서 '나'또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모두 사회의 공동체원임을 인식하고 불평등을 조금이나마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일 것이다. (어떤 노력을 해야하는가 즉, 노력의 방안은 따로 적지 않고 생각만 하겠습니다.)

Posted by 정원호
,
흔히 평균을 구할때는 전체 개체들의 값에서 전체 개체의 수를 나누어 주면 되는 방법으로 평균을 구한다.
예를들어 이런것이다. 5,4,3,2,1 평균은 3이다.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런경우는 어떨까?
1,2,2,2,3,3,3,3,3,190
이런경우는 평균이 압도 적으로 올라간다. 평균값은 21.2다.
이는 평균을 대표한다고 할 수 없다. 
아 이값들은 21.2가 되겠구나 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나머지 9개의 값이 전부 3이거나 3보다 작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균값에도 기본적인 한계가 있다.
평균값이 집단을 대표할 수 없는 사례는 분명히 있다.
그래서 수학에서도 최빈값이라던가 중앙값을 대표값으로 쓸때도 있지 않는가.

GDP는 국내총생산으로서 나라의 경제성장을 가늠하는 지표라고 한다.
하지만 GDP가 10%늘었다한들
모든 사람들의 생활여건이 10%향상되었는가... 생각해봤을때 판단하기 쉽지않다.

소득불평등지수인 지니계수도 전에 비해서 계속 오르고 있다고 한다.(뭐..추세인지는 모르지만 복잡한것은 모른다.)
그 소득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엥겔지수도 올랐다고 한다.

대표값은 평균일 수도 있고, 가장 수가 많은 계층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평균은 이 사회의 대표값으로 옳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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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원호
,
1. 법이란게 과연 약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법이란 것이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출연한 것은 고조선의 8조법에서다. 알다시피 고조선은 청동기~철기시대 국가이고 그 당시에는 식량 생산이 많이 증가하여 잉여재산이 생겼고, 가진 자 못 가진 자에 따라 사유재산(내 재산)이 발생하여 계급이 생겼다. 이 과정에서 기득권층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법이란것을 만들었다. 즉, 법이란 것은 애초부터 약자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물론 사회보장법같은 좋은 법도 많고, 사회에 해가되는 높은분(?)을 처벌할 수 있는 법이 있지만, "법은 약자편이다" 라는 말에 대해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법은 피해자의 손해에 대한 보상 혹은 가해자의 처벌을 하는 것일뿐 약자라고 더 봐주지는 않는다. 법에서 봤을때는 부자가 분유 한 통을 훔치든 가난한 자가 분유 한 통을 훔치든 죄값은 똑같으니까...(형법??) 
빈곤하고 살기 절박한 사람들이 범죄행위 그리고 법적 처벌에 더 많이 노출되있는 것 만큼은 분명하다. (부자,기득권들이 범죄할 수도 있다해도 그들은 법의 헛점을 이용하거나, 혹은 좋은 변호사를 선임하여 머리좋게 처벌을 피해갈 확률이 높기때문에....)

2. 법은 보수성을 띌 수 밖에 없다.

"사법(司法)은 본질적으로 법 질서의 유지와 법적 평화의 실현을 그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소극적· 현상유지적·수동적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사법부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법을 해석하여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적용하는 기관으로서, 사회적 변화를 선도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 변화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려는 속성을 갖는 것이다.
또한, "법"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사회의 여러 문제와 갈등을 통제하고 통합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원은 자신의 판결이 세상을 놀라게 하지 않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다시 말해 보수성을 기본적 가치로 표방하는 "조직"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법관들이란 그 직역(職域)의 특성상 개인적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명하기를 꺼리는 것이 일반적인 바, 오죽했으면 출처도 원전도 전혀 알 수 없는 "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는 넌센스가 하나의 법언이요, 경구인 것처럼 일컬어지기까지 할까.
어쩌면, 이러한 법원과 법관의 보수성이란, 극심한 사회 변화 속에서 법의 이름으로 중심을 잡아 달라는 요구에 따르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각주:1]

 이처럼 법이란 것은 보수성을 띄는 것이 당연하다. 덧붙여 말하자면 법을 공부할때는 흔히 예전 판례를 통해서 배운다. 그말은 법이란 것이 과거의 판결사례를 주(主)로 그것에 맞게 해결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몇몇 진보적인 법조인도 있을 것이나 대체로 보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론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란 무엇인가?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최근에 나꼼수의 정봉주씨가 대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았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리 놀랄일이 아니다. 판결을 통해 약자는 법에 체념할 뿐이며, 법이란 성향자체가 빠른 사회환경에도 갈피를 잡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사회는 변화하고 있다. 그토록 많이 논의되던 호주제도 폐지되었고, 국가보안법도 논의되고있다.
잡음은 언제나 시도때도 없이 생기지만, 여러사람의 노력으로 사회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게 나의 결론이다. 그러니 너무 초초해 할 필요는 없다.

  1.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natsuiro&logNo=40005587147&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본문으로]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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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5세 무상교육 반대한다. 조선일보 5/17일자 화요일. 어떤분 의견게재. 원문 일부.

<<만5세 무상교육에 반대한다. 첫째, 돈을 받지 않아도 되는 고소득층까지 국가의 지원을 받게되므로, 재원이 제한된 상태에서 저소득층은 상대적으로 적은 지원을 받게 된다. 빈부격차를 고려하지 않은 불평등한 정책이다.
 둘째, 국내 만 5세 아동이 한 두명이 아닌데 무상교육을 장기적으로 실행할 경우 정부에 막대한 부담이 생긴다.
셋째,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꾸 지원을 해주면 국민들이 나태해 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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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돈을 받지 않아도 되는 고소득층까지 국가의 지원을 받게되므로, 재원이 제한된 상태에서 저소득층은 상대적으로 적은 지원을 받게 된다. 빈부격차를 고려하지 않은 불평등한 정책이다.

- 일단 고소득층이 정부의 무상교육을 과연 좋아할까? 자기 자식에게 만큼은 있는 돈으로 특별한 교육을 시키고 싶어 할 것이다. 정부의 교육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사교육이 한 예가 되겠다.) 이것을 전제로 하자. 꼭 기억하자!!
 
1-1. 재원이 제한된 상태??
재원은 세금인데 세금은 제한적이지 않다. 세금을 걷는 범위를 넓힐 수 있다. 즉, 재원은 제한된 상태가 아닌것이다.  빈부격차를 고려한다면, 오히려 세금을 (특히 직접세를) 더 걷어야한다.
1-2 불평등한 정책??
 무상교육이 없다면 고소득자녀는 고급교육을 받을 것이고, 가난한집 아이들은 돈이없어 오히려 교육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될 수 있다. 무상교육을 하게되면, 부자아들이나 저소득아들이나 똑같은 교육을 받게된다. 그것이 진짜 평등이라고 생각한다.(정부의 교육을 신뢰할 수 없다는 논외로 치자. 위에서 말한 불평등의 논점에서 이야기 한것이다. 세금이 많이 확충된다면, 충분히 질 좋은 교육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둘째, 국내 만 5세 아동이 한 두명이 아닌데 무상교육을 장기적으로 실행할 경우 정부에 막대한 부담이 생긴다.
2-1 장기적으로 실행할 경우 정부에 막대한 부담이 생긴다??
 정부의 돈은 한정적인 것이 아니라 매년 예산으로 정해져서 나온다. 정책을 장기적으로 실행하면 부담이 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착이 된다. 안정화되기 때문이다. 
 
셋째,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꾸 지원을 해주면 국민들이 나태해 질 수 있다.
가장...이글에서 전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일뿐더러 가장 충격적인 부분이 아닐까...
<이 분의 논리>
나태=게으름=태만=근면하지 못하다=일을 게을리한다 Why? Because 부유층에게 지원해주기 때문에.

-재벌들에게 특혜주고, 집권층이 챙겨먹는 현실을 국민들이 다 알고있는데....우리국민은 가장 게으른 민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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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겠습니다.
주장) 만 5세 무상교육 대상 저소득층에게 선별적 선정지원하자!
하지만 우선 부자들이 과연? 정부에서 하는 무상교육을 좋아할지 생각해볼것!! 부자들은 오히려 무상정책 싫어함.

주장에 대한 반론)
1. 부자들과 다른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것. 진짜 평등한 교육이다.
2. 교육의 양극화가 일어날 것.->만 5세에까지 사교육판이 활개칠 우려가있다.
3. 빈부격차를 고려하는 것 자체가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차별이며, 이것이 진정 불평등임.
재벌가 아들이든, 저소득아들이든 그 자체로는 모두 피교육자다. 
굳이 교육받고 안받고의 여부를 그 아이 본질이 아닌 타요인으로 구별할 이유가 없다.

내 생각에는...)
출산률이 조금은 오르길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 무상급식도 같은 의미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음.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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