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20명 정도가 모여 자기소개를 해야할 일이 있었다. 한 사람이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우산이 되고 싶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을 지켜주는 우산이 되고 싶습니다."
구성원들 모두 멋지다고 이야기했다.
반면 나는 쉽게 동조하지 못했다. 우산이 주는 안전과 따뜻함 이면에는 우산 밖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산 밖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비를 맞아야 할까?'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우리'라는 단어는 양면적이다.
한편으로는 따뜻하다. 공동체를 생각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라는 단어는 배타적이다. '우리'라는 말은 울타리 밖에 누군가가 있어야 성립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 세대'는 다른 세대가 있어야 가능한 단어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우리 한국인'은 외국인이 있어야 성립한다. 더 나아가 '우리 인류', '우리 생명체'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타자를 규정해야 생길 수 있는 단어이다. 배타성이 더 커질수록 '우리'는 더 끈끈해진다. 적이 더 많고, 강할수록 '우리'는 더 끈끈해진다. 타자가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더이상 필요없는 단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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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라는 울타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나는 "'우리'란 표현을 없애자", "'우리'의 크기를 제한없이 늘리자" 같은 이상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란 표현을 없앨 수는 없다. 어쨌든 이 사회에서는 우리와 가까운 사람, 먼 사람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크기를 무제한적으로 늘릴 수도 없다. 실천적으로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테레사 수녀 같은 훌륭한 사람이 아닌 이상, 가족과 처음 본 사람, 사물을 동등하게 대할 수는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우리가 '우리'라고 생각하기 앞서(즉, 우산의 크기를 생각하기 앞서), 어느정도 크기인지는 생각 정도는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우리'라고 말할 때 배제되는 사람들이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로 인해 제외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동안 신경쓰지 못했던 사람, 생명체, 사물들에 대해서도 다정해지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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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우리' 혹은 '나'가 철저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고정된 사람은 어느 상황에서나 '우리'(혹은 나 자신)만을 신경쓴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 집단(자기 자신)만 우선이 된다.
나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사리에 맞게 여의봉처럼 늘었다 줄었다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특정 상황에서는 가족을 중시하고, 특정 상황에서는 지인들을 소중히 여기고, 특정 맥락에서는 환경을 중시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상황에 따라 우산의 크기를 지혜롭게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산의 크기를 상황에 맞게 잘 판단하여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유연한 우산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