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팔이/학창시절'에 해당되는 글 17건

  1. 2024.01.19 대학 시절 화학 실험에 대해 느낀 생각
  2. 2023.05.08 편하게 대하기
  3. 2022.03.10 자작
  4. 2021.11.02 동아리
  5. 2020.05.15 기억나는 은사님
  6. 2019.12.07 고요속의 외침
  7. 2019.11.28 "How often" 게임
  8. 2017.09.18 잔인한 놈
  9. 2017.06.01 인생 최대의 위기
  10. 2016.12.17 학교 선배

대학교 3학년 시절에 실험에 대한 생각을 적은 편지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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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정원호 학생입니다. 말씀하신 후에 집에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가지 느낀 사항들을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1. 실험은 인내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실험이란 원래 원하는대로 잘 안나오는게 당연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실험을 하기전에 계산을 통해 이론적으로 이런값이 나올 것이다 예상을 하고 실험을 하지만, 역시나 원하는 데이터가 나오기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원하는 데이터가 계속해서 나오지 않을 경우 필요한 것은 인내와 체력이 아닐까란 생각을 했습니다.

에디슨이 발명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고자 했던 끈기와 집념, 그리고 그걸 할 수 있는 체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학부과정에서는 시간적인 한계 상 많아야 2~3번의 시도밖에 할 수 없지만, 나중에 학부과정을 졸업하여 전문적으로 공부를 할 시에 이러한 상황에 부딪친다면, 결국 체력이 밑바탕이 된 상태에서 포기하지 않고 끈기를 더욱더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이번 실험 수업을 통해 느끼게 되었습니다.

 

2. 창조, 발견의 과정은 쉽게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실험 수업은 노력의 발견 과정을 직접 체험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업에서 실험은 2~3번 과정을 통해 이러이러한 결과가 나왔다라고 결론짓지만, 이 실험을 처음 시도한 과학자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수많은 가정을 하고, 수많은 반복된 실험을 통해서 결론지은 것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배우는 화학은 돌턴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업적과 성취속에서 이뤄진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 4~5시간의 실험은 과거 과학자들의 과정에 비하면 힘들다고 말하기는 초라할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3. 작은 것을 잘 챙겨야 한다.

저는 세세한 부분들을 잘 챙기지 못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가끔 덜렁대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분석실험의 경우 결코 사소한 실수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작은 오차도 큰 차이를 초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지시약의 경우, 우습게 보기 쉽지만, 색깔이 더 잘 보이지 않을까란 이유로 많이 넣어서는 안됩니다. 지시약 자체가 산이나 염기로 작용할 수 있기때문에 많이 넣을시에 반응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콩나물 500g과 콩나물 501g은 별차이가 없지만 화학의 경우 시료 1g만 달라도 큰 차이가 나올 수 있습니다.

실험은 특히 주의와 집중을 요하며, 역설적으로 작은 것이 매우 큰 차이를 보임을 (당연한 것이지만)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상입니다~!

(12.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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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장애를 가진 친구가 있었다. 나와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당시 다른 아이로 부터 그 친구가 '원호랑 있는 것이 가장 편하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들었다. 

 

그 얘기를 듣고 무척 놀랐다.

나보다는 다른 아이들이 더 잘 대해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령, 그 아이의 가방을 들어주거나, 그 아이를 부축해준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 친구를 같은 반 학생으로 대했다. 굳이 나서서 도와줄 것을 찾으려하기보다는 친구가 혼자 해결하도록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친구가 도움을 요청하면(그럴 일도 거의 없었다) 그제서야 도와줬다. 

--

그 친구의 언급은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영향을 주었던 사건으로 기억한다. 

특정 사람(외국인, 장애인 등)을 배려한다고 여러 행동을 하지만, 원치 않는 과한 도움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가령, 왜소증인 사람과 대화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것은 그 분에게 지나친 배려같다. 오히려 그런 행동을 부담스러워 할 것이다[관련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Lus9eT5SW-8]. 

특별하게 여기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불편함을 줄지도 모른다. -특수한 몇 가지를 제외하면- '내 주변인들과 크게 다를 것 없다'라고 여기는 것이 타인을 더 편하게 대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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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추억팔이/학창시절 2022. 3. 10. 19:01

대학교 3학년 때, 나는 교내 가톨릭학생회 회장이었다. 

동아리 사람들과 술자리가 있었다. 

먹다가 술 잔이 비었는데, 성격상 부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탓에 자작을 했다.

 

옆 친구가 혀를 찼다.

B: 야 임마! 자작하면 앞 사람 3년간 솔로야. 뭐하는 짓이야?

원: 아 미안..

나는 내 앞 자리를 보았다. 

 

 

우리는 모두 당황했다.

앞에 신부님이 앉아계셨다.

 

 

 

 

사족: 학교에서 동아리방 없이 정말 어렵게 운영해야했다. 나를 비롯해 모두 고생을 많이했다. 그 당시의 사투에 대해서는 이 링크 글을 참고해줘도 좋을 것 같다. 참고(동아리): https://ideaspace.tistory.com/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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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2학년 시절 아웃사이더를 벗어나고 싶어 동아리를 찾아보았다.  

당시에 신실한 종교인은 아니었지만-지금도 그렇다-, 당시 하고 싶은 동아리가 딱히 생각이 안나서, 카톨릭 학생회에 들어가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 https://ideaspace.tistory.com/613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회장이 되어 있었다. 나 포함 5명이었던 멤버가 8~9명 정도까지 되었다.

이후 후임자에게 회장을 물려주었다. 하지만 운영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주모임마다 2~3명만 오는 상황이었다[각주:1].

대학원 진학 공부 중, 동아리를 없애야 될 것 같다는 소식을 받았다. 

결국 내가 동아리를 잘 가꾸지 못하여 그런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이 동아리는 적어도 40년이 넘는 역사가 있는 동아리다[각주:2]. 창립제를 열면 적어도 20~30분의 선배들이 오신다.

이러한 동아리가 내 대에서 끊어졌다는 것에 대해 항상 죄책감이 있었다. 그래서 선배들을 뵐 면목이 없었다. 

 

최근 매우 오랜만에 선배들을 만났다. 

선배로부터 우리 동아리가 다시 부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개해 준 인스타그램을 보니 과거의 이름[토마스아퀴나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꺼진 불꽃에서 어떻게 불이 피어난 걸까? 놀랍고 감사한 일이다. 

후배님들이 너무 대견하다. 자랑스러운 선배일지 의문이지만, 조만간 후배들을 응원하러 갈 생각이다.

 

 

 

 

  1. 후임자의 잘못이 아니라 외부적 요인이 문제였다. 기회가 있다면 이를 추후에 서술해보겠다. [본문으로]
  2. 일전에 창립제 시 60학번 선배가 오신적도 있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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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1때 였다.

당시 국어 선생님은 김수현 선생님이셨다. 

본인을 '벼리샘[각주:1]'이라고 하셨다. '벼리'는 어떤 일에 있어서 근본이나 뼈대가 되게 하는 것이라는 순 우리말이다.

벼리샘은 자신의 이야기를 종종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다. 

어릴적 벼리샘은 호기심이 많고 감수성이 풍부한 문학 소녀였다. 

또 벼리샘에게는 우애깊은 오빠가 있었다. 밖에서 노는데 춥다고 하자 오빠가 낙엽을 모아 불을 붙여줬는데 하마터면 산을 태울뻔했다고 하셨다.


내가 배울 당시 국어 교과서는 교육부에서 일괄적으로 만든 교과서였다. 저자 중 한분은 고대 국어교육과 노명완 교수님이었다. 벼리샘은 그 분의 제자라 그런지, 교과서에 아주 충실하게 수업을 진행하였다. 현재 나는 문학작품을 그다지 많이 읽고 있지 않지만, 당시 나는 그 분을 통해 잠시나마 문학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읽고 밑줄치고 시험에 나오는것을 가르쳐주시기보다[각주:2]는 인물들의 정서, 감정을 느낄 것을 강조하셨다. 가령 소나기를 배우면 관련된 노래나, 작품들을 많이 보여주시고, 관련된 일화를 들려주신 좋은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내 글을 무척 좋아해주셨다. 솔직하고, 담백하다고 하셨다. 당시 글쓰기 재능은 나와 거리가 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선생님은 나의 글쓰기를 칭찬하고 자신감을 많이 북돋아 주셨다. 

선생님은 국어는 객관식이 아닌 주관식일때 진정한 자기실력을 볼 수 있다며, 2학기 중간고사때 100% 올 주관식 국어문제를 출제하신 적이있다[각주:3]. 그 중 가장 배점이 높은 10점짜리가, '소나기' 소년의 입장이 되서 소녀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었는데, 정말 진솔하게 썼다며 내 글을 다른 학생들앞에서 낯간지럽게 칭찬한 뒤 읽어주시던(?!) 기억이 난다.

교내 백일장때는 '엄마'라는 제목으로 어머니가 그동안 살아오셨던 삶과 어머니의 하루를 있는 그대로 썼는데, 교내 백일장 은상을 받았었다. 알고보니 선생님의 추천 덕분이라고 들었다. 


선생님은 당시 27~28 살이었고, 우리 학교가 첫 부임지였다. 

선생님은 언제나 열정으로 똘똘 뭉치신 분이었고, 그로 인해 국어 시간은 활기찼다. 

본인의 열정대로 따라오지 않는 반 아이들에게 때론 서운함도 보이기도 하셨고, 감정적으로 많이 힘들어하기도 하셨다. 열정으로 인해 감정적 소모도 많이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에 상관없이 학생들을 한명 한명 보듬아 주셨던 좋은 분이다. 

------


당시 소나기를 배웠다. 

벼리샘은 원래는 중 3 교과서에 실려있는 내용인데, 

요즘 아이들 감수성에 맞게 중 1로 낮추었다고 말했다. 


소나기를 읽던 날 벼리샘을 통해 이 곡을 처음 접했다.





  1. 몇몇 친구들은 이름을 살짝 고쳐 '버리셈'이라고 하였다. 하여간 센스쟁이들이다. [본문으로]
  2. 기억하기론 시험을 위한 수업이라는 느낌을 받은적이 없었다. [본문으로]
  3. 그 많은 학생 채점은 언제 다 하셨을까? 새삼 존경스러워진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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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3 이맘때(12월 경)였던 것 같다.
이 시기에는 특목고 진학으로 인해 기말 고사를 빨리친다. 그래서 12월이면 놀자 분위기다.

수학 시간(백원준 선생님)이었다.

한 친구가 호기롭게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원: 수업 안 들어?

친: 음악이나 들어야겠다.

------
그 날도 백원준 선생님은 학생들이 어렵게 느낄만한 문제를 던져주었다.

적막이 가득했고 선생님은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고요---------

갑자기 누가 크게 외쳤다.

"야 백원준 존나 거만하지 않냐? ㅋㅋㅋ"

이어폰을 낀 그 친구였다.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모르는것 같았다.

모두가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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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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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다. Always, usually, often, sometimes, occasionally, rarely, seldom, never ..... 등의 빈도부사 카드가 있다.

빈도부사 카드 3장을 뽑는다. 그리고 상대방이 그 카드에 맞게 대답하도록 "How often~?" 질문을 던져야 한다.
가령 usually, rarely, often을 가지고 있다면 상대방이 "usually", "rarely", "often" 이라고 대답하도록 질문해야 한다.

나는 "always", "never", "thrice a week"카드가 나왔다.

신사같은 질문들만 지루하게 오고갔다.
기다렸다. 내 차례다.

원: How often do you go to the moon?

당황한 교실 분위기가 느껴졌다.

옆자리 학생: ...... Can I lie?
선생: No.

옆자리 학생: Never.
원: ㅇㅋ 굿

돌아왔다. 다시 내 차례

원: "How often do you breathe?"
고통받는 옆자리 학생: oh my god! I always breathe.

원 : "always!" ㅇㅋ 굿

-----
그러나 내 질문 때문인지 병맛스러운 질문들이 시작되었다.
-------

타인: How often do you die?
일동: ......?!

모두 공황상태가 되었다.
선생님은 서둘러 게임을 종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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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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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때 학원에 다녔었다.

 

학원에 올때마다 영어단어를 외워가야 했다.

 

우선순위 영단어라는 책이었는데, 3일치를 외웠고 거기서 60문제가 나왔었다.

 

60문제 중 10문제까지 틀리는 것은 봐주지만, 11개 이상부터는 손바닥 매가 1대씩 추가된다.

남자건 여자이건 간에 예외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단순 암기를 무척이나 낯설어하는 학생이었다.

못/안(?) 외웠기 때문에 거의 항상 매를 맞았다[각주:1].

 

어느덧 나는 매일 안 외워오는 학생의 대명사가 되어있었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권력에 굴하지 않는 반항아/독립투사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무슨 제임스 딘이냐?

 

----

그 날도 단어시험이 있던 날이었다.

 

시험을 볼때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했던 편이었다.

 

그날도 나는 시험에 최선을 다했다.

 

----------채점 뒤 시험지를 나눠주었다-------------

 

웬일인지 그 날은 선생님께 매를 맞지 않았다.

 

 

----------사건의 전말--------------------

 

 

오늘도 내가 아는 단어는 9~10개 정도 뿐이었다.

 

막힘없이 써내려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 역시 단어시험에 나름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분명 나는 '잔인한[각주:2]'이란 글자를 단어장에서 본 것같았다.

 

여백보다는 빽빽한게 뭔가 나을 것같아서, 나머지 50개를 '잔인한'으로 채워넣었다.

 

 

선생님은 시험지를 나눠주면서 내가 십여년을 가르치면서 이런 학생은 처음이라고 어이가 없어 하셨다.

반 전체에 웃음을 나누어준 관계로 그 날은 매를 맞지 않았다.

 

 

학원친구들은 대단한 패기라며 나에게 감동을 받은 듯했다. 나를 '잔인한 놈'으로 부른 건 덤이었다.

 

학원에서 나의 명성[각주:3]은 더더욱 높아져만 갔다.

 

 

  1. 학원가는 버스안에서 급하게 외웠던 것같다. 13~18개 정도밖에 못 맞췄다. 그러므로 손에 불이나도록 맞았을 거라는 얘기. [본문으로]
  2. 그 단어는 'cruel'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3. famous인지, notorious인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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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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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위기 상황이 도래할 때가 있다.


 


경험이 쌓이는 것은 당연하기에, 나중에는 대단치 않은 일이 되어있겠지만

(훈련소를 다시 입소하게 된다면, 확실히 덜 힘들것 같다)


일단 처음 겪는 당사자에게는 무척 곤혹스러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


8살 때였다.


물론 박자연과도 친했지만 (참고: 서울 공진초등학교에 관한 글)

이지훈과도 친했다.


내가 검도장에 다닌다는 것을 알고, 검도장에 등록을 했을 정도로 친했다.


어느날 검도학원이 끝나고 같이 오는데, 이지훈이 새로운 놀이를 제안했다.



장난감 활. 끝에 빨판이 있어 잘 붙는다.

장난감 활쏘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동의하여 문방구에서 500원 짜리 개량 활을 샀다.


우리는 서로 즐겁게 활쏘기를 했다.


나는 기분이 좋았는지 하늘위로 화살을 쏘고 줍고 다시 쏘는 짓을 반복했다.


--------------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생겼다.


활을 쏘다가 집근처 약국 간판에 빨판이 의도치 않게 붙어버린 것이다.


약국집 이름은 한솔약국 이었는데

'솔'과 '약'사이에 빨판이 붙었다.


약국 주인은 안에 있었다.


나는 이지훈과 이 사실을 주인에게 말해야 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두려운 마음에 도망을 가고 말았다.


우울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갔다.

8년의 세월을 살면서 중 이렇게 우울했던 적이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께 얘기를 했다.

어머니는 내일 약국에 가보자고 하셨다.


----

전전반측하다 아침이 왔다.

용기를 내어 약국에 가봤다.


실눈을 뜨고 간판을 봤는데 놀랍게도 활은 없었다.


기적에 감사했다.

활이 왜 떨어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당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나는 하느님께 깊이 감사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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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난김에 하나더,


아마 학교를 졸업하면, 그 학교를 나온 유명한 선배들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내가 다닌 학교에도 유명한 많은 선배들이 있다.

 

다 소개하기는 어렵고,

중학교, 고등학교 각각 한분씩 대표로 소개해보는게 어떨까한다.


중학교의 경우

유재석씨?가 내 중학교 선배였다.


중학교 도서관에는 그동안의 졸업앨범을 모아놨었는데

어떤 개념없는 아이가 유재석의 사진을 잘라가버렸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당시에도 탑MC였으니까 말이다)

이름표 색을 보아 아마 1년 후배였던것 같은데

아.. 나는 목격자다. 


그 뒤에 많은 후배들이 얼굴을 못봤을 것을 생각하니

그때 당시 강력하게 제지했어야 하지 않았나라는 생각도 든다.


고등학교의 경우 또한 많은 훌륭한 분들이 있지만, 이 선배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지 않겠다. 보면 알것이다.


https://ko-kr.facebook.com/DSBR2013/videos/719388931437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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