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학생은 학교 불난줄 알더라
'추억팔이/학창시절'에 해당되는 글 17건
- 2016.12.17 고등학교 수업종소리
- 2016.12.14 사회과 부도
- 2016.09.15 키다리 vs 숏다리
- 2016.08.11 별명
- 2015.12.31 노래방 - 1
- 2015.05.07 체육시간 2
- 2015.04.30 수학과 학벌 2
나는 초등학교 시절 그닥 운동을 좋아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점심시간에 뛰놀던가, 축구를 하는 다른 남자아이들과 달리
가끔은 피아노학원에서 배운 곡을 풍금으로 연주하거나
교실 창가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거나 혹은 책을 읽거나 했던 것같다.
가끔씩 아이들과 놀기도 했었는데
실내에서 할 수 있는 공기놀이나, 빙고놀이 같은 것을 했던 것같다.
초등학교 5학년에도 마찬가지로 큰 변화는 없던 것같다.
그때 내 짝꿍은 이은지라는 아이였는데
키가 작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여자아이였다.
수련회때 장기자랑이 있었는데, 춤을 굉장히 잘 췄던 것같다.
태극기가 가운데 새겨진 베이지색 가방을 메고다녔다.
머리는 노란색이었는데, 맥주로 탈색해서 그렇다고 이야기하곤했다.
박자연이 그 아이를 좋아했는데,
집에 갈때면 이은지와 어떤일이 있었는지 묻곤했다.
평소 그 아이 앞에서 행동하는 거나, 선물 같은 것을 준것으로 보아 아마 이은지도 알고있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여자아이가 인기가 꽤 있었던 것같다.)
나는 그 아이와 한 학기 정도 동안 짝꿍이었다.
그 아이는 친근한 성격이어서 쉬는 시간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것같다.
어느날 이은지는 사회과 부도에서 지명찾기 게임을 하는게 어떻겠냐는 참신한 제안을 했다.
가령, '명륜동'이라고 외치면, 상대방은 시간을 재는동안 지도에서 명륜동이 어디있는지 찾아야 한다.
더 짧은 시간이 걸린 사람이 승리하는 게임이었다.
해본 결과 굉장히 재미있었다.
그래서 이은지와 점심시간마다 그 게임을 하곤했다.
사회과 부도에는 많은 지도가 있었다. 세계지도나 한국전도, 미국지도 등 많은 지도가 있었지만,
글자가 빽빽했던 수도권 지도를 가장 많이 했던 것같다.
한번은 내가 진적이있었는데,
이기겠다는 마음에, 집에 들어가 몰래 사회과 부도를 놓고 공부한적도 있었다.
---
아마 지금 내가 알고있는 지리지식에
이 게임이 조금이나마 기여한게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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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2때를 생각해보니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노태훈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키가 크고 공부를 잘했다.
1학기 중간고사였때였나?
아슬아슬한 차이로 내가 2등을 했었는데
그때 이후로 날 대하는 노태훈의 태도가 달라진듯했다. 라이벌로 인식했달까?
가령 이런류의 조롱을 주로 하곤했다.
"정원호 ㅋㅋㅋ 엄마 젖이나 더 먹고와 ㅋㅋㅋㅋ"
우리반은 키순서대로 번호를 매겼다.
노태훈은 5번이었는데 그 친구의 키는 174~175cm정도 였던것으로 기억한다.
노태훈은 키다리 3인조로 다녔는데 한명은 2번 백창준이었고 한명은 4번 이대영이었다.
삼인조는 떼를 지어다녔다.
노태훈과 그 일당들은 조롱 뿐만 아니라 속히 말하면 무릎빵을 하기도 했다.
가령, 서있는 정원호를 본다면
3인조는 "Avenger" 라고 외치며 내 무릎뒤를 공격하곤 했다.
(서있는 상태에서는 무릎에 힘이 실려있는데,
무릎뒤를 공격하면 무릎에 힘이 풀리면서 자연스럽게 무릎 꿇게 된다)
원: 앗!
노: 역시 정원호. 나에게 무릎을 꿇다니 ㅋㅋㅋㅋ
---------------
어김없이 그날도 "Avenger"를 당했다.
"ㅋㅋㅋ 또 무릎꿇었다 ㅋㅋㅋ"
"노태훈 비겁해, 키 큰 3명이 1명을 공격하냐?"
"ㅋㅋㅋ"
"남자답게 승부하자"
"뭐로?"
"농구로 승부하자. 너희는 키가 크니까 나쁘진 않을껄?"
"ㅋㅋㅋㅋ 정원호 질려고 환장했냐?"
"일단 해보자니까?"
"지면?"
"앞으로 형님이라 부를게, 대신 내가 이기면 다시는 "Avenger"하지마라"
"그냥 지금 불러 ㅋㅋㅋ"
"됐고, 2주 후에 붙자"
"ㅇㅋ"
--------
나와 영택이와 선민이는 항상 같이 집에 갔다.
굳이 따지자면 우리도 3인조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나의 상황을 얘기했다.
키가 작은 것도 서러운데, 그렇게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영택이와 선민이는 키다리들에 대한 분노를 금하지 못했다.
하지만 절망스럽게도 우리가 불리한 조건임은 부인할 수 없었다.
나는 20번, 영택이는 14번, 선민이는 20번 후반대였다.
연습만이 살길이었다.
하교 후 우리는 일주일에 3~4번씩 2시간정도를 농구장에서 연습을 하고 집에 갔다.
"원호 학원은 안가?"
"그게 중요한게 아니야. 일단 연습하자!"
나름 열심히 연습했다.
---------------평가전----------------
체육시간 이었다.
체육교사: 자 오늘은 여기까지! 이제 자유시간이다.
노태훈이 다가왔다.
노: 야 정원호! ㅋㅋㅋ 농구대결 어때?
원: 그래! 상대해주지.
키다리와 숏다리의 평가전이 시작되었다.
4번 이대영: 야 정원호 지고 울지마라
이대영: 개소리하네 ㅋㅋㅋㅋㅋ
반코트로 경기를 했다.
경기를 기억해보자면 거의 완패에 가까웠다.
이대영과 백창준이 골밑에 있었는데
우리든 상대든 노골이 되면 그 둘이 가볍게 리바운드를 했다.
그리고 노태훈은 가드였는데
노태훈으로 부터 공이 시작되고 이대영에게 패스가 되면 골밑슛을 쏘곤했다.
막고는 싶었지만, 키차이로 인해 속수무책이었다.
아주 단순한 공격패턴란 것을 알았지만 이기기 쉽지 않았다.
(노태훈은 심지어 조롱하듯이 공을 굴리면서 드리블 했다)
10:3이 었나? 대충 그랬던 것같다.
"정원호 ㅋㅋㅋㅋ 역시 넌 나한테 안돼"
"아 졌어. 분하다, 다음게임은 정식으로 하는거니까 원코트로 하자"
"그래 ㅋㅋㅋㅋ 지지나 말아라 ㅋㅋㅋ'
-------------
이제 본게임을 위한 준비를 해야했다.
사실 원코트로 하자는 제안은 전략이었다.
평가전을 해보니, 반코트로 하니까 백창준과 이대영은 거의 골밑 아래에 좋은 자리에서 진을 치기만 하고있었다. 그리고 공이 오는대로 키를 이용해 쉽게 받아먹었다. 이상황에서 우리팀의 리바운드가 정말 쉽지 않았다.
하지만 원코트면 다르다. 원코트는 농구 특성상 진영을 왔다갔다를 많이 하기 때문에 백코트가 늦을 수 있었고, 또한 반코트때처럼 좋은 자리를 고정할 수 없기 때문에 리바운드면에서 키다리들의 유리함이 많이 상쇄될 수 있다. 따라서 원코트라면 우리가 그다지 불리하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2
평가전은 도움이 많이 되었다.
우리는 평가전을 거울삼아 전략을 제대로 짜기로 했다.
원: 일단 우리는 속공으로 가자. 저쪽이 골을 넣자마자 내가 반대쪽 골대로 달려갈게. 속공으로 찔러줘. 그럼 내가 레이업으로 슛을 넣는 작전으로 가자.
....작전 논의중....
원: 그리고 슛정확도를 높이자. 저쪽이 리바운드를 할 기회를 아예 주지않도록 자신이 좋아하는 코스에서 계속 연습하자.
우리는 합의를 했고 대충 이러한 틀에서 전략을 짜기로 했다.
우리는 남은 한주동안 연습을 했다.
나의 경우 (주로 선민이가 찔러주는) 속공으로 받는 패스를 받고 레이업슛하는 동작을 연습했다.
그리고 미들슛을 연습했다. 백보드를 맞고 들어가는 슛(뱅크슛)도 연습했다.
영택이는 슛정확도가 좋아서 주로 슛 연습을 했다.
선민이는 키에 비해 점프력이 좋았다. 자리선정만 잘하면 리바운드에서 승산이 있어보였다.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고 분석까지 했다.
영택: 원호 슛을 쏠때는 팔이 이렇게 되어야하고, 점프시에는 앞으로 뛰면서 슛을 날려야해.
하여간 많은 준비를 했다.
------------------그날이 왔다--------------
경기는 수업이 끝난 오후 4:30
공은 내 공으로 하기로 했다.
15점 내기 승부
"노태훈! 이번엔 지지않겠다"
"ㅋㅋㅋㅋ"
2번 백창준과 영택이가 점프볼을 했다.
이번경기는 저번과 달리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경기는 호각지세였다.
노태훈은 도발하고자 공을 굴리는 드리블을 시도했다. 하지만 저번과 달리 별로 동요가 크지 않았다.
효과는 미미했다.
노태훈팀의 주 득점원은 역시 리바운드와 골밑 슛이었다.
하지만 저번에는 리바운드가 거의 n:0 으로 압도적이었다면 이번에는 7:3정도로 훨씬 나아졌다.
선민이가 고군분투로 리바운드를 하면, 나는 선민이를 믿고 적 골대로 뛰어가 공을 받고 레이업슛을 하는 양상으로 진행하였다. 속공작전이 정말 효과가 좋았다. 키다리팀은 알면서도 속공작전에 당했다.
엎치락 뒷치락 속에 경기는 종반으로 가고있었다.
어느덧 스코어는 14:14, 노태훈 팀의 공격찬스였다.
하지만, 노태훈 팀은 노골을 했고, 공격권은 우리에게 넘어왔다.
마지막 공격은 속공이 아닌 천천히 공격을 시도했다.
노골을 대비해 이대영이 골밑을 지켰고 노태훈과 백창준이 수비를 했다.
따라서 마크가 한자리가 비었다.
"영택아 여기!!! 빨리"
마크가 빈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나는 자신있는 코스에 있었다.
나는 영택이의 패스를 받았다.
---
우리는 승리했다.
다음날
노태훈은 완전히 풀이 죽어있었다.
나는 호기롭게 명언(이라고 생각하고)을 던졌다.
"키가 작다고 얕보지마라
노태훈 기억해
-----
이겼을 때의 통쾌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만큼 우리는 정말 그 승부에 몰입을 했다.
그 승리는 내게 중2~중3동안의 자신감의 밑거름이 되었다.
학창시절 나에게도 별명이 있었다.
누군가 내 별명을 묻는다면 아마도 난처해할것이 분명하다.
내 별명은 '원호지존'이다.
낯간지럽다.
별명이 붙여진 이유를 생각해보면 역시나 단순하다.
기원은 아마 고2때 첫 체육시간이었던것같다. 그때 내가 아마 임시반장이었던 것같다.
축구를 했는데 골을 넣었다.
그리고 나는 '원호지존'이 되었다.
별명이 성립하려면 여러사람들의 암묵적 동의가 있어야한다.
보통 첫 사람이 명명식을 거친뒤 호응을 유도하기 위해 몇번 밀어본다.
하지만 주위친구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으면 그새 반응은 시든다.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캐릭터를 부여하려는 몇몇 친구들의 시도가 있곤했지만, 1
그때마다 호응은 시들했고, 그래서 마땅한 별명이 없는 상태였다.
그와 달리 '원호지존'은 타이슨이 별명인 김종혁이란 친구가 주도했고
고2시절 내내 따라다녔다는 점에서 꽤 흥했던 것같다.
원: 내가 왜 원호지존이야?
타이슨: 넌 존재자체가 지존이야.
※ (타이슨이란 별명은 중학교때부터 시작되었는데 고등학교 까지 따라왔다고 한다. 안습 근데 진짜 타이슨 닮긴함.)
물론 처음에는 원호지존이란 별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주 부담스러워서 손사래 쳤는데 그게 도리어 역효과를 내어 더 확대되었다.
이따금씩 언어영역을 잘 보면 '언어지존'이라고도 불렸다.
고3이 되었다.
물론 고3때 대다수의 같은 반 아이들은 내 별명을 몰랐지만, 2학년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나를 '원호지존'으로 불렀다. 그래서 원호지존이라는 별명은 졸업할때까지 지속되었다.
--------------
생각해보니 별명으로 굳히면 주홍글씨 처럼 지겹게도 따라다니는듯 하다.
몇몇 친구들의 예를 보면 그런것같다.
고2때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이 시험 주관식 문제에 지문으로 나온적이있다.
주인공에 대한 점순이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구절을 묻는 문제였다.
답은 '감자 세 개' 였는데,
한 친구는 안타깝게도 답을 '니나 먹어라'로 적었다.
이 답안은 굉장한 임펙트를 주었고, 그 친구는 1년 내내 '니나 먹어라'로 지칭되었다.
그러고보니 중2때 였나 김창후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우연히
그때 이후로 이름이 불리든, 발표든, 무언가 할때마다
그 시그널이 단체로 합창되었다.
학교를 땡땡이 치는 아이로 둔갑되었다.
생각해보니
별명은 억지로 민다고 되는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즉, 적절한 타이밍, 착착 붙는 어감, 이름, 외모등의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나올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
지존이라니
동국대에 있다.
그러고보면
12월 31일마다 동국대에 있네.
이상하다. 여하튼
----회상------
중3 12월 31일 오후 11시 연기대상을 하고있었다.
따르릉
여보세요?
원호! 나 찬호
왜?
노래방가자 나와
지금? 우리 미성년자인데.
일단 나와
엄마 저 놀다올게요
어디가니?
노래방이요
갔다오렴
우리엄마도 참 비범하다.
여하튼 친구들을 만났다.
찬빈이 나 찬호 민규까지였나? 여하튼
노래방을 찾기로했다.
----회상의 회상---
노래방이란 곳을 중3때 처음갔다.
당시 노래방은 어른들만 가는곳으로 알고있어서
처음갔을때 가도되는 건가란 생각이 앞섰다.
하지만
음악을 워낙 좋아하다보니
금방 적응했다.
친구가 내가 노래부르는 것을 핸드폰에 저장했다.
다음날 수업시간에 내가 부른 영상이 퍼졌다.
오리날다를 불렀던것같다.
내가 노래방 소파위에서 방방뛰고있었다.
A: 이게 정원호야?
B: 미쳤군
---노래방에 미쳤었다.---
노래방을 찾기로 했다.
처음 보인곳은 'SBS 노래방'이란 곳이었다.
원호 우리 미성년자인데 들어갈 수 있냐고 물어봐바
아...;;; 왜 내가?
일단 문을 열어봤다.
분위기가 야릇한게 영 이상했다.
원: 야 나가자. 여기 아닌것같아. 느낌이 이상해
뭔가 이상해 노래방
간판을 다시 살펴봤다.
조그만하게 '미인 항시대기'라고 적혀있다.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실패한후 나는
그럴싸한 논리를 들이댔다.
노래연습장을 가자.
노래를 연습하는 곳이잖아.
거기는 정말 노래만 부를것같다.
노래연습장에 갔다.
아주머니가 허락해주셨다.
한해의 마지막을
노래 연습장에서 보낸 기억이 난다.
그리고 노래방과 노래연습장이 구별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알게 된것같다.
요즘 초등학교마다 운동회가 많은 것같다.
----------------또 회상-----------------------
만약 선천성이란 것이 있다면
난 선천적으로 운동신경이 둔한 아이이다.
반대로 두 동생들은 운동신경이 좋다.
특히 여동생같은 경우에 걸음마를 8개월때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 어머니의 말대로 라면
돌이 지나서도 걷지 못했다고 한다.
걸음이 느린 아이.....
초등학교때는 체육시간을 가장 좋아하지 않았다.
1학년때 50m달리기를 했다.
선생: 여러분. 50m달리기를 할 거에요. 시간을 재서 여러분 손에 시간을 써줄거에요.
내 차례다.
준비 땅.
힘껏달렸다. 골인.
하지만 선생님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내 손등에 글씨를 쓴다. '20'
그렇다. 20초이다.
당시 내가 지그재그로 달렸다고 한다.
뜀박질을 제대로 안해봤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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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체육시간에 하는 활동중 가장 싫어했던 것은
축구였다.
싸움을 잘하는 아이들은 축구도 잘하는 경우가 많은데
축구를 못하는 아이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자유시간이 주어졌을시
나는 정글짐에 올라가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학교운동장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생각해보니
체육시간때 그나마 잘했던 것이 있다면
피구였는데
아..던지는 것이 아니고, 피하는 것이다.
피구경기를 승부의 추가 기울때즈음 많은 경우는 내가 마지막에 남았다.
심지어 어떤 날은 너무 잘피한탓에 경기를 마무리 못짓고 체육을 마친적이있다.
한번은 이런일도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때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내가 피하고 있었다.
초등학교때 정말 좋아하던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짝사랑녀: 미꾸라지 같이 잘도피하네
반 일동 : 미꾸라지래. 하하하하하
나는 잘 피하려고 했을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운동신경이라기보단 본능이었던 것같다.
살고자하는 의지가 강했던걸까?
짝사랑녀 앞에서 한낱 미꾸라지가 아닌
멋지게 공을 던지고 싶었다.
이미지 트레이닝도 해봤지만
공이 나에게 오면 현실은
A: 야! 니가 던지지말고 패스해패스.
.....여하튼 공을 피하는 것은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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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동생은 운동신경이 참 좋았다.
6학년때 학교 운동회를 했다.
동생 둘은 모두 반 대표로 계주선수로 선발되었다.
원: (친구들에게) 내 동생 두명이 모두 계주에 나가~
...경기중...
동생이 스타트라인에서 대기하고 있다.
원: 저것봐! 내 동생이야.
동생은 뛰었다.
하지만 코너를 돌다가 바통을 떨어뜨렸다.
친구: 아.... 니 동생때문에 졌잖아. 아... 청군이 이길 수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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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청군이 졌다.
괜찮아?
형.. 옆에 애가 바통을 쳤어. 아... 잘 달릴 수 있었는데..
아니야. 진짜 잘했어. 너무 자랑스러웠어. 잘했어!
내가 못하는 것을 하는 동생들이 대견했다.
동생둘 모두가 대표로서 계주하던때를
지금도 너무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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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때까지 2년반정도 동안 태권도를 다녔다.
초등학교 5학년때까지 나는 중등도비만이었는데
키가 10cm크면서 몸무게는 48kg으로 늘거나 준것이 없었다.
그때 엄마는 나를 태권도장을 다니게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 좋은 선택이셨던 것같다.
키가 갑자기커서 뻣뻣해지기 쉽고, 균형있는 신체를 만들기위해 운동이 필요한 시기에
태권도를 하게 되어서 운동능력도 많이 향상된 것을 느꼈다.
중학교 2학년때는 격투기부로 들어오라고 관장님이 권유하셨다.
하지만 격투라는게 싫었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할 것같아서(뭐라고?) 그 이후로 태권도장을 그만두었지만
여하튼 그때 운동을 열심히한 것이
운동을 좋아하도록 바꾼 요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
농구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는 남학생이라면
슬램덩크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슬램덩크를 통해 나는 농구에 입문했다.
송태섭을 따라하면서 "한골만 넣자" 하질않나.
"리바운드는 내가 제압한다."란 기합을 넣질 않나.
허세에 빠져있었다.
여하튼
중학교 3학년때
체육선생님이 특이한 기말평가를 하셨다.
농구를 대략 5~6명 6팀으로 나누어
리그제를 실시한다고 하셨다.
순위가 높을 수록 실기에서 좋은 점수를 받게된다.
팀편성을 했다.
우리반에서 에이스로 평가되는 6명이 나왔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원하는 아이들을 골라갔다.
기억한다.
기대않고 친구들과 희희덕거리는 중이었다.
"원호 커먼!"
생각지도 못한 이른 호출.
원 : 야 왜 날 뽑았어. 성적 잘받으려면 더 잘하는 애를 데리고 와야지.
에이스 : ㅋㅋㅋ 재미있게 농구하려고.
......
다른 팀들은 경기에서 지거나 답답한 상황마다
소리를 지르고 윽박지르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팀은
정말 격려하는 분위기에서 재미있게 농구를 했다.
물론 리그전 결과 성적은 좋지않았다.
(4등인가 5등?)
하지만 성적과 관계없이
그때 친구들과 즐기면서 했던 농구가 가장 재미있었다.
물어물어보니
에이스는 지금 아이 아빠라던데, 잘 살고있는지
-----------------------------------
난 체육이란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꼭 필요하다고 보는데
고등학교에서는 체육이란 것을 너무 등한시했던 것같다.
친구들과 많이 구기종목을 하지 못해서 아쉽.....
아... 두 동생은 학창시절에도 여전히 운동신경이 좋았다.
남동생은 중학교때 학교대표 축구선수(라이트윙)였고
여동생은 중학교때 진지하게 체고입시를 권유받았었다.
나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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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도
물론 지금 체육활동이라면 근근히 하고있다.
동생과 주말엔 캐치볼을 하고
평소엔 산책
때때로 자전거를 탄다.
그뒤로 원호는 운동을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길어질까 급마무리-----------------
집에서 연구실까지는 1시간 30분이 걸려서
왕복하면 3시간이다.
하루에 3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냐는 무척 중요한 문제인 것같다.
보통은 통학 하는 내내 음악을 듣곤 했었다.
매주 4~5곡씩 업데이트를 하곤했는데
이런곡 저런곡 하도 듣다보니
때때로
음악듣는 것도 지겨울때가 있다.
그래서
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생각하다가 수학문제들을 풀기로 했다.
노량진에 가면
전국연합모의고사 뿐만아니라
사설기관 모의고사까지 1년치를 모아놓은
33개정도의 모의고사 모음을 구할 수 있다.
오며가며 수학문제를 풀고있다.
--------------회상------------------------
어렸을때 수학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과학을 좋아한다기보다
수학을 좋아하기도 했고, 수학을 잘하면 이과가 유리하다는 조언에 따라
이과로 가게 되었다.
나에겐 수학문제를 풀시에 이상한 고집이 있었다.
이상하게 '답을 보면 지는거다'라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답지를 없는 것 취급했다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좋은 점은 생각지못한 기발한 풀이가 간혹 나올때가 있지만
나쁜 점은 시간을 너무도 많이 소비한다는 것이다.
집에 내가 못풀었던 문제를 모아놓은 노트가 있다.
답이 없어서 손을 놓고있는 상태...
가끔씩 펼쳐보는데 정말
.....
무슨배짱으로 답을 없애버린건지 모르겠다.
정말 답이없다.
--------------------------------
학원.
수학을 혼자공부했었는데
학교에서 수2와 미적교과서를 동시에 병행하는 상황에서
나는 위닝일레븐과 사랑에 빠져있었다.<-미쳤던것같다.
고2말에 학원을 다니게된다.
하지만 그 학원은 이미 선행학습을 미리 다 끝낸상태였고
문제풀이만 들입다 돌리고있었다.
그 당시 가장 미쳐버리겠던 건
dy/dx 뭐 이런것들인데
아이들은 그러한 기호를 익숙하게 쓰는 것같았다.
나는 그냥 내 방식대로 풀었다.
아이들은 꽤 어려운 문제를 그 방법으로 쉽게 푸는 것같았는데
나는 안풀릴때도 있고 영 접근이 안되었을때 답답했다.
하지만 그냥 내 방식대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같다.
(물어보려 하지도 않은것이 신기하다.)
수능
수능을 봤다.
나는 5문제를 찍었다.
그 중 3문제를 맞췄다.
(나름 신빙성있게 찍어보려고 노력했던 기억이난다.
x의 길이를 자로 재보거나, 답이 적당히 크기가 이정도 되어야 할 것같다.. 이런식으로...)
전교생 수능 성적자료를 본적이 있는데
수학은 5등을 한 것 같았다.
역시 운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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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강사와 재도전.
대학교 1학년때
아버지 지인의 도움으로 목동의 수학학원 강사를 하게된다.
내가 가르칠 아이들은 중1학생들이었다.
따라서 공부할 필요가 그다지 없었다.
그래서 날로먹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 학원을 다니던 재수생이 물어보러온적이 있다.
(동갑이라 말을 놨다.)
이것 어떻게 풀어?
나는 보았다. 미적이고 dy/dx부분이었다.(꼭 내가 모르는 걸 물어본다.) 알리가 없었다.
(아...ㅅㅂ 잘 모르겠는데....) 음....
아..그래! 이거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해가지고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아... 그런가?(여전히 모른다.)
자기가 잘할 거면서 왜 물어본건지 모르겠다.
이것은 약과다.
원장님이 고2학생을 부탁하셨다.
이걸 잘 모르겠어요.
음..어디보자...
....
5분후..
...음...
우리 답지를 한번 봐볼까?
나는 답지를 보고 국어책 읽듯이 읽어나갔다.
아이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여자아이었는데 신뢰를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그 여자아이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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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1학기에
나는 미적분학을 수강하고있었다.
내가 모르던 dy/dx를 다룰 기회가 생겼다.
강사님의 명강의를 통해 깨달음에 도달했다.
이런 것을 모르고 어떻게 문제를 풀어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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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강사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여러가지 일들은 나의 자존심을 박박 긁어놓았고 결국 불공부를하게 만들었다.
학교에서 미적분학 공부에 추가적으로
학원에서 개인 시간이 주어질때마다 고3모의고사를 풀고 정석책을 다시 펼쳐봤다.
돈을 받으니 책임감이 생겨 공부를 더 열심히 했었다.
그때 수학실력이 많이 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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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강사2
나는 대학교 2학년때 5월 부터 11월 정도까지 강남 서래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다.
현대고 하고 세화고애들 5명이었다. 내가 반의 선생님이었다.
고 2아이들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했고, 나름 질문에도 친절히 응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이 많이 물어보러왔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들이 언제부턴가 평소와 다르게 질문을 뜸하게 했다.
이유는 이렇다.
나는 아이들에게 절대 내가 다니는 대학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첫째로 현실적 이유에서 좋은 대학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딱히 이익이 되지 않을 것같기도 했다.
둘째로 선생이라면 강의 실력으로 평가받아야지 대학으로 평가될 수는 없다.
아이들은 너무도 궁금했던 나머지 다른 선생님에게 나의 대학을 물어봤다고 한다.
언젠가 이런이야기를 들은 적이있다.
"동국대 나온 사람한테 잘배워봤자 동국대밖에 못가는 거 아니야?"
나는 나보다 좋은 대학의 선생님들보다 수업준비를 더 열심히했다.
나름 내 실력에 확신도 있었다.
그렇지만 학벌이란 벽을 현실에서 크게 실감했던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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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보내는 일과 가장 관련있는 사교육의 경우 학벌이 무척 중요하겠지만
그 경우를 제외하면
학벌이 능력을 압도할 만큼 큰 요소라고 보기 어려울 것같다.
내가 인사 담당자라면
우리 조직에 이익이 될 사람을 뽑아야 한다.
그렇다면 능력있는 인재를 선택하지
학벌만 좋고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사람을 선발하진 않을 것이다.
그것은 위험요소가 너무크고 비합리적이다.
따라서 결국 실력이 중요한 판가름이라고 본다.
예전에는 피해의식이 많이 있어서
면접이나 다른 지원에서 떨어졌을때 내 학벌을 탓하던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좌절할 만한 상황이 발생했을때마다
학벌이란 틀로 자신을 얽매는 것은
학벌때문에 아무것도 못하는 놈으로
자신의 가능성이 이것밖에 안된다고 제한하는 찌질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속히 말하는 일류대학생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학창시절에 공부를 성실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그러한 불이익을 감수해야한다.(뭐...예를들자면 부족한 영어실력이라든지.)
과거로 시간을 돌리지 못하는 이상
내가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는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이라도 정신차리고 열심히 하는 방법밖에는 없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