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14(월)

내 자전거에는 바구니가 달려있다.

바구니가 있어 참 편리하다. 가방이나 혹은 잡다한 것이 있다면 거기에 싣을 수 있기때문이다.

하지만 바구니가 꼭 좋지 않을 순 있다. 세워놓은뒤 자전거를 찾으러 갈때면, 전단지나 담배꽁초가 있을때도 있기 때문이다. 내 바구니는 좋은 물건을 담는 수단이 될때도 있고, 쓰레기통이 될때도 있는 것이다.

 

오늘 문득 집에가는 길에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아이스크림을 갑자기 먹고싶어졌다.

나는 자전거를 세우고, 아이스크림을 사고왔다. 먹고보니 쓰레기를 버릴곳이 없었다. 난 그것을 내 바구니에 담았다.

 

남들은 그것에 관해 어떻게 생각할까? 저 사람은 아마 자전거 바구니를 쓰레기통으로 인식하고 있구나 할 것이다.

사실 내가 그렇게 행동한 것이 사실이다.

 

만일 내가 바구니를 쓰레기통이라고 여기고 행동한다면, 남들또한 그것을 쓰레기통으로 인식 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다. 남들도 그 바구니에 쓰레기를 버릴지 모른다.

 

내가 그 바구니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남들은 그 바구니를 쓰레기통으로 인식하지 않을 것이다.

 

자존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내 자신도 내가 어떻게 내 자신을  평가하냐에 따라 남이 보는 내 가치도 좌우된다고 생각한다.

나를 어리숙하고 낮게 본다면, 그 이야기를 들은 상대방또한 그리할 것이다.

나의 장점을 단점에 비해 크게 어필한다면, 남또한 내 자신을 가치있는 사람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너무 부풀려서는 안 된다.

뻔한 고물바구니를 부풀려야 금세 탄로가 나기때문이다.

 

하지만, 적절한 자존감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꼭 필요한것같다.

간편한 인터넷이나 모바일 등으로 많은 사람과 교류할 수 있게 되었지만, 관계는 더 얕아진 것같다.

이러면에서 좀 슬프긴 하지만, 이런 세상살아가는 처세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약게 살아간다는 것이 꼭 옳은 방향일까?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진솔하게 드러내는 것이 옳을 수도 있지 않을까?

 

추상적으로 결론이 귀결되는 것 같지만 결국 중용을 지켜야 할 것같다.

조금더 업무상이나 공적인 자리에서 만났을때는 내 자신을 어필하는 쪽으로 가야하고,

사적이고 인간적인 자리에서는 조금은 내 자신의 진솔함을 드러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친구들에게 "너는 너무 자신을 낮게 평가한다."라고 들은 적이 있다.  

어쩌면 그것은 소중한 바구니를 쓰레기통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도 나와 평생을 함께할 바구니를 조금은 자랑스럽게 여기고, 훌륭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내 자전거 바구니를 보면서 하게되었다.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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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그대로 블로그는 상어와 같다고 한다.

상어에게는 어떤 습성이 있는가?

상어는 헤엄치지 않으면 죽는다고 한다.

상어는 부력을 조절하는 부레가 없기때문에 헤엄을 치지 않으면 가라앉는 것이다.

그래서 상어는 가라앉지 않기위해 끊임없이 헤엄친다.

 

블로그도 마찬가지이다.

무언가 글을 올리더라도 끊임없이 올려야 할것이다.

한순간만 올리고 장기간 멈추게 되면 그 블로그는 죽은 블로그가 될 것이다.

그러면 글을 끊임없이 올리기 위해서 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내가 블로그를 해야하는 목적이 뚜렷하야한다는 것이다.

한번해볼까?란 목표는 결국 흐지부지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목적을 가지려면, 결국 열정이 있어야한다.

내가 이 것을 꼭 해야한다는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열정이 무언가를 꾸준히 하게 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할 것이다.

 

여러 블로거들이 주의해야 할점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시작할때 너무 의욕을 가진 나머지 열정이 너무커서 지쳐버릴 수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자면, 매일매일 일기장을 써야해서 일기쓰는게 싫어진 사람의 예를 들 수 있겠다.

뭐든 내가 즐기기위해서 하는 것이다.

 

상어도 미친듯이 헤엄칠경우 홀쭉해지고, 에너지도 모두 소비하게 될 것이다.

도를 지나쳤을때는 그것에 관해 지쳐버리기 마련이다.

 

상어답게 멋있게 헤엄치자. 바다의 제왕처럼,

시나브로,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글을 써나가다보면 어느덧 최고가 되어있는 자신의 블로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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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크리스마스.

나에게는 25번째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다.

 

24일 이브날.

세례를 받는 친구를 위해서 성당미사에 참석했다.

내가 미사에 참석한 곳은 홍대입구역 근처였다.

 

홍대에는 많은 연인들이 왔다. (몇몇은 아닌것 같았지만) 모두들 행복해보였다.

집에오는 길에 눈이 내렸다. 하얀 눈이 내렸다. 모두를 축복하는 하얀눈.

어두운 밤에 새 하얀 눈. 아름다웠다.

 

재작년 이 날 나는

후임들과 성당에서 성탄 전야제를 했다. 하늘을 달리다와 falling slowly를 불렀다.

여러사람들의 호응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이 크리스마스날

지금도 경계를 지키고, 자기일에 열중하는 국군장병들이 있다.

 

더 깊이 생각해봤다.

눈이 오는 화이트크리스마스는 누구를 위한 크리스마스일까?

지금의 크리스마스는 낮은자를 위한 의미가 맞는가?

 

눈이 내리는 거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포장마차 아주머니는 음식을 팔고있었다.

치킨배달부는 치킨을 배달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있었다.

크리스마스에 연탄을 때며 홀로 보내는 독거노인이 있을 것이다.

서울역 지하보도에서 술에 의지하는 노숙인들도 있을 것이다.

 

지난 크리스마스를 생각해보았다.

어렸을때 크리스마스는 산타에게 선물을 받는 날이었다.

학창시절 크리스마스는 학기말이 끝나고 노는 날이었다.

대학생의 크리스마스는 술마시고 노는 날이었다.

다 나를 위한 날이었다.

 

이번 25번째 크리스마스에는 낮은 자, 약자들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비록 내가 아무것도 해주는 것이 없지만 그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것이

조금은 더 떳떳할 것 같다.

 

낮은자를 위한 크리스마스가 되길,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도 메리크리스마스라고 외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회가 되길 25일을 맞으며 생각해본다.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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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도..21살의 정원호가 쓴 귀여운 글.

역시나...지금보다는 더 투쟁적이고, 자극시킨 글을 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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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무서운 것일까? 심판을 받는...또 착하게 살면 영생을 누리는 그런 곳일까? ㅎㅎ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너가 생각하는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을 수 있겠다.

죽음에 관한 내 생각을 적어보겠다.

난 다른 사람들이 내 글에 관해서 물어뜯는것을 좋아한다.

몇몇 사람들에게는 이 글이 상당히 거북스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생각임을 밝힌다.

자신의 생각이 있다면 언제든지 반론도 좋고 태클도 환영한다.ㅋ

 

나에게는 인생, 사회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친지나 지인의 죽음을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다. 외할아버지는 내 생전에 돌아가시고, 외할머니도 태어나서 일주일 후에 돌아가셔서 죽음이란 것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다. 살아오면서 죽음이란 것에 대해 딱히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다. 일단 유년시절에는 죽으면 하늘로 올라가고 신이 자신을 지옥으로 보낼지 천국으로 보낼지 판단하는 것으로 단순히 믿고 있었다. 천주교를 믿고 있었기에 성당에 자주 다녔고, 곧이곧대로 믿었던 것 같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죽음은 무엇일까? 죽음이라는 것은 심장박동이 멈추고 어떠한 생명, 물질대사를 할 수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상태다. 죽음으로 인해 사람이 생각하는데 쓰이는 ‘뇌’의 기능이 멈추게된다. 즉, 생각할 수 있는 기관이 작동을 멈춘다.

동물은 죽으면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가령 개구리가 죽으면 미생물은 개구리를 탄소, 질소 등으로 분해한다. 이 분해물은 다시 식물에게 중요한 양분이 되고, 초식동물 등의 먹이사슬을 거침으로서, 생태계는 보전된다. 인간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 아닐까? 땅속에 묻혀서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고 결국 식물에게 양분이 된다. 후에 그것은 거치고 거쳐 먹이사슬의 끝자락인 인간에게도 양분이 될 것이다. 자신의 일부분이 인간에게 또는 여러동물들에게 양분이 된다. 또한 그것이 번식, 생장을 위해 쓰인다. 어쩌면 죽음이라는 것은 이런 점에서 새로운 탄생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죽음관이다. 결국 자연에서 태어나 결국 자연으로 다시 돌아간다로 볼 수도 있겠다.

죽음에 대한 종교주장(천국 및 지옥, 염라대왕, 여러 사이비사상 등등)을 죽음관으로 삼고 싶지는 않다. 우선 내가 그 사상에 관해 모르는 것이 많을 수도 있겠으나 현재 내가 이것들에 관해 알고 있는 지식으로 봤을 때는 증명되지 않은 부분이 더러 있는 것 같다. 그것에 관해 설명하는 사람도 본인은 죽음을 본 것도 아니고 분명 체험한 것도 아닐 것이므로 어떻게 보면 신뢰성이 상당히 부족해 보인다.

두 번째로 종교단체들이 주장하는 죽음에 대한 감성적인 해석을 좋아하지 않는다. 태어나면 죽고, 생기면 소멸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제대로 규명되지도 않은 자신들만의 해석을 붙여서 죽음을 여러 가지로 해석하는 것(가령, 신비스럽고,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시작이다, 우리는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을 위해 현실의 삶에 미리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이런 말들은 사람들의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공략하기 위한 상술이라고 생각한다.

한번은 자신은 천국을 가기위해 기독교를 믿는다는 친구와 잠시 산책하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죽음 뒤의 삶이 더 중요한 것이기에 자신은 기독교를 믿는다고 했다. 즉 내세를 믿는 것이었다. 그 친구가 말하는 죽음 뒤의 삶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사는 현 세상은 죽은 뒤의 순간보다는 무척 짧은 것이기 때문에 긴 시간을 준비하기 위해서 라고 했다. 이것은 앞의 나온 나의 죽음 관과 분명 다르다. 나는 죽은 뒤의 삶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형태로 봤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반박하였다. “너도, 나도 죽음 뒤의 삶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그래 그 세상이 있다고 치자! 하지만 그래도 죽음 뒤의 삶을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할지는 의문이다. 가령 100m달리기 선수에게는 올림픽에서의 그 10초의 짧은 순간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중요한 시간이다. 물론 100m 달리기 이후 노년, 장년의 긴 시간이 있다. 하지만 난 이 10초를 가장 그에게 있어 중요한 시간으로 본다. 나 같으면 이 10초에 내 모든 것을 걸겠다. 그래 네 말이 맞는다면, 죽은 뒤의 시간에 비해서 지금 현세는 무척 짧다. 그러나 지금 이 현세의 짧은 순간이 내가 모든 것을 바칠 그런 중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나는 죽은 뒤의 영겁의 시간보다는 현실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이름을 남기는 쪽을 택하겠다.”라고 말했다.

죽음이란 것은 딱히 경험해 보지는 못했지만 지금 내가 보는 죽음관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관점이다. 종교란 것은 안식을 찾기 위해서라는 것도 있지만, 죽음이란 것을 감성적으로 자극하는 종교 관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몇몇 사람들의 말처럼 죽음 뒤에는 내세가 있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그들의 말이 옳다 해도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현재 느끼고, 보며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죽음이란 것을 준비하기 보다는 지금 현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육상선수에게 올림픽결승 단거리달리기 대회의 그 짧디 짧은 10초는 평생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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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인해 뇌가 기능을 멈춘다. 생각을 못하고 의식도 없게된다. 내세란것을 경험할 능력도 없다.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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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시작한게

11년 4월이었는데.

시작한지 1년 반만에..ㅠㅠ

드디어! Olleh~!!

이제 십만명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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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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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리 1.

가족과 정말 친한 친구 한명만 알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않은 사실이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벌써 4~5년이 지난 만큼 큰 의미는 없을 듯 하다.

사실 나는 수능을 두번 봤다.

그 말뜻은 뭐냐면 동국대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학교를 재학하면서 수능을 쳤었다는 뜻이다.

고등학교 3학년때 수능성적에 맞춰서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고만고만한 대학에 왔다고 생각했다.

책만 읽는 교수님, 낙후된 시설, 공부하려는 마음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노는 주위 과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대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인가 회의가 들었었다. 1학기때는 학교수업만 마치면 집에 오곤 했었다.

 

친구들도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fm을 외치고, 게임만 하는 술자리 속에 내가 원하는 대화, 사람을 찾기는 힘든 분위기 였다.

항상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고등학생 처럼 집에 칼퇴를 하는 열정적인 1학년 같지 않은 생활을 했던 것같다.

 

그리고 쳐야겠다는 마음이 더 굳어진 계기가 있었다.

1학년때 학원에서 수학선생을 했었는데, 모의고사를 풀 기회가 생겼다.

우연히 풀었는데, 100점이 나왔다. 이후에 계속 풀었는데 보통 1개틀리거나 운이 나쁘면 두개를 틀리곤 했다.

가르쳐야하니 공부 시야가 넓어진 것같았다. 내 자신이 완전히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법까지 생각해야 한다.

 돈을 받는 입장에서 책임감도 생기고, 또한 학교에서 미적분학을 공부하면서 약했던 미분적분을 다 잡는 계기가 되었다.

 

영어도 고3겨울때 토익을 하다보니 감각도 떨어지지 않았고, 과학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수능을 다시봐야겠다.라고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2학기가 되었다.

원서를 접수하고 본격적인 아웃사이더 생활을 했다.

리딩2를 수강하면서 영어를 하고

미적분학 2를 하면서 수학을 하고

일반화학을 하면서 과학을 하고

나머지는 동영상강의나 널널한 것을 수강했다.

 

난 2학기때 두집살림을 했다.

하지만 꿈이 있었다. 이곳을 벗어나리라. 높은 곳에서 더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것.

열심히 했다. 성적은 점점 올랐고, 확신은 없었지만 해볼만 하다고 생각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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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왔다. 수능장에 가는 날이다.

어머니가 태워다 주시기로 했는데 차가 많이 밀렸다.

그래서 나는 도중 도로에서 경찰차를 타보는 최초의 경험을 했다.

3분 남기고 아슬아슬하게 들어갔다.

교문앞에 고등학교때 담임선생님이 계셨다. 고등학교 때와 기분이 많이 달랐다.

 

수험장에 갔다. 사실 그 이후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시험 성적이 나왔다........

그렇게 만족스럽진 않았다. 원점수는 비슷한데, 시험이 쉽게 나왔기때문이다.

높은 대학을 쓰기는 민망한 점수고, 그렇다고 비슷한 대학을 쓰기에는 들었던 돈과 시간이 아까웠다.

고민을 많이 했고, 결국 포기를 했다.

나는 시간을 낭비한 것일까? 나는 그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하면 물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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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리 2

2013학번이 되는 학생들은 이제 시험을 본다.

수능이란 것은, 성인이 되기위한 첫 통과의례라고도 한다.

하지만 그 것으로 인해 서열이 발생하고, 그 서열이 인생의 수준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

그동안 초등학교 때부터 익혀온 12년 정도의 교육수준의 척도가, 그 날로 단숨에 평가를 받는다는 점,

진짜 성적이 아닌 운에의해 좌우될 수도 있다는 점.

수능은 분명 불공평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생각해봤을때

1%는 흔히말하는 좋은 학교에 입학한다.

나머지는 그저그런 학교에 간다.

나머지는 좌절할때마다 이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아 난 역시 OO대학이니까. 잘하는 애들이 위에 있는데 뭘."

무의식적으로 패배감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평생 안고가야 할 짐일 수도 있다.

 

수험생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능에 대한 부담도 안가졌으면 좋겠다. 평소대로만 나오면 진짜 잘 본 것이다.

대학교에 오면서 분명 후회도 하고 패배감에 젖을때도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고, 지금도 그럴때가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 모두 일어서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다.

 

동국대에 강연을 오신 선배한 분이 계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셨다.

위대한 사람은, 항상 앞서가는 사람이 아니라 바닥을 치고 올라갔을때 정말 위대한 사람입니다.

우리 대학이 소위 말하는 2류대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불이익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피나는 노력을 해야합니다.

 

그 피나는 노력의 의미를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정말 치열한 것인 것임을. 느껴가고 있다.

 

경쟁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있다.

모두가 승자가 될 순없다. 사회제도의 변화가 없는한 이런 것은 당연한 것일 것이다.

패배주의에 빠질 순 있다. 하지만, 그것에 자신을 맡기지 말고, 합리화하지말고

일어서자, 다리가 후들거려도, 일어나려 노력은 해보자.

 

인생의 끝은 수능이 아니다. 수능은 인생이란 전쟁터를 헤쳐나가기 위해 지급받는 첫 무기다.

잘하면 총을 얻고 못하면 나무막대기를 얻는다.

하지만 그것이 싸움에서 이긴것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니까.

중요한 것은 그 뒤에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수험생들. 시험 잘 보세요.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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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선을 다한다는 것. 다짐을 쓸때나 이야기할때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라고 이야기 하지만 막상 해보려고 하면 쉽지않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최선이란 "온 정성과 힘" 이란 뜻이다. 즉, 어떤 상황에 있을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도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내 인생에서 최선을 다한 적이 있는가? 고백하건데 학창시절에는 널널하게 공부하느라 가진적 없는게 최선이었다. 아니, 아주 다급한 상황에서는 그럴 수 있을 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등학교때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대학교 2학년때가 생각난다. 내가 학업이 좋지 않았던 한 과목이 있었다. 나는 내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맞는데 내가 못하는 이유. 성적은 머리순이라고 생각했다. 군대때 이등병 때였다. 암기사항을 주었다. 잘 못 외웠다. 남들보다 잘 외우지 못하는 것 같았다. 2달뒤 후임이 들어왔다. 누구보다 잘 외웠다. 선임들은 A급이 왔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군대에서는 항상 같이 있기때문에 그 친구를 유심히 볼 수 있었다. 머리가 좋은지 보려했다. 그 친구는 어디서나 그것을 가지고 다녔다. 화장실에서도 외웠고, 자면서도 복기했고, 샤워를 하면서도 나에게 물어봤다. 두뇌의 차이가 아니다. 나와 그 친구는 그 차이를 가진것이다.

 자연스럽게 대학교 2학년때를 떠올렸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생각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내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내가 한 노력에 비해 너무도 많은 것을 얻었다. 한것에 비해 높은 결과가 나왔고, 다른 사람들의 노력에 비해 성취가 높았던 적도 몇번 있었다. 그런 삶속에서 나는 노력의 가치를 낮게 평가해 왔던 것같다. 대학교 전공공부를 하면서 드디어 평소하던 것으로는 안된다는 한계점에 도달 했고, 그 해답을 찾지 못해서 오랫동안 방황했었다.

 

 두서없이 길었지만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최선을 다하려할때 나는 내 자신을 만난다. 나약한 내 모습을 만난다. 편하게 있고싶고, 적당히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내 모습. 거기에 나는 많이 순응하며 살았다. 위대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간의 차이를 생각해본다. 평범한 사람은 거기에 항상 순응한다. 적당하게 살아서 딱 그 위치까지 밖에 성장할 수 없다. 위대한 사람은 다르다. 그것을 이겨내고 더 나아간다. 평범한 사람과 위대한 사람의 차이는 그 차이라고 본다. 물론 자기 자신을 이겨내는 사람중에 위대한 사람이 아닐 순 있지만, 위대한 사람은 모두 이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가로막는 것은 바로 편안함, 안락함, 익숙함이다. 편안한 삶속에서 새로운 시도를 싫어하고 하기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인가? 새로운 시도가 안되게 하면되는 것이고, 하기 싫어하는 것을 마음먹기에 따라 바꾸면된다.

결국 생각의 차이라고 본다. 생각을 바꾼다면, 행동을 바꿀 수 있다. 행동이 어느덧 습관이 되면, 새로운 시도가 아니라 일상으로 정착이 되고 그것은 성과물로 이어지게 된다. 어느덧 그런 삶이 편안한 것, 자연스러운 것이되고 나름 그 삶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말은 이렇게 썻지만 이행하고 있는가? 보면 그렇지도 않은 부끄러운 내 자신.

고요한 연못에 작은 돌을 던지면 파장이 되어 연못전체가 출렁거리듯이. 결국 작은것 하나가 인생을 바꾸게 된다고 생각한다.

 답은 작은 것을 고치면 되므로 간단하지만, 막상 몸으로 해결하기에는 어렵다.

하지만 만족스런 삶을 살기위해서는 반드시 이행해야 할 부분이다.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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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2일 추석과 개천절 징검다리를 낀 화요일

오랜만에 블로그를 와서 뜻밖의 것을 보았다.

진짜? 정말로?

122라니..

122명이 내 블로그에서 뭐했을까? 그분들을 일일이 알 수는 없지만

알수없는 122개의 끈이란 것에 감탄스럽기도 하고 믿기지도 않는다.

 

2. 추석에 뭐했나?

게임을 했다.

삼국지11과 위닝일레븐 애니팡과 캔디팡을 했다.

하도 했더니 눈이 빠지는 것같다.

휴식과 게임으로 많이 느슨해졌다. 지금 집에서 출발하려 하는데 노는것에 익숙해서 그런지 기숙사로 갈 엄두가 안난다.

 

내일 부터는 바쁘겠구나...

학교에 가면 항상 똑같은 자리에 앉아 공부하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그들은 보통사람들이 보기에는 힘든생활 일 수 있겠으나,

그들은 일상을 통해서 나름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아가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나에겐 끈기가 무척 부족하다.

신나게 놀고나서 12시간을 뻗으며 지낸 이번 연휴...후회가 되지는 않지만

내가 해야할 과제와 예,복습거리, 읽고 싶은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지금

추석때 나와서 평상시 처럼 꾸준히 공부를 하는 그들이 참으로 위대해 보인다.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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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데이즈 이벤트 바로 가기 -> http://blog.hanwhadays.com/1473

 

1. 여러번 신청했는데 한번도 가지 못한 서울세계불꽃축제 티켓.

2매가 나온다면..

그동안 공부한다는 핑계로 어머니, 아버지의 등을 휘어드리게 했는데,

이 소중한 이벤트가 당첨이 되어서 부모님께 소중한 추억 남겨드리고 싶다.

85년도에 결혼하셨으니...지금은 어느덧 두분이 함께 하신지 근 30년이 되가는데,

큰 아들로서 꼭 효도하고 싶은 바람이다.

 

2. 불꽃을 보며 빌고싶은 소원.

세상사람들이 너무나 바쁘게 살고있는 것같다.

그런 세상속에서 사람들의 무관심을 받으며 살고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불꽃을 보면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묻지마 범죄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들은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아무리 삶이 힘들어도...살아있기에 아름다운 것은 존재한다.

모든사람이 평화롭고 행복하길. 그리고 느리게 사는 삶이 되길. 소원한다.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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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태양은 부모님이다.
태양은 언제나 환하게 비칩니다. 그래서 고마움을 모르고 살지요. 나에 대한 관심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태양을 쳐다보면 눈이 아픕니다. 언젠가 저는 똑바로 쳐다보려 한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무능함이란 이유로 반항을 한것이지요. 하지만 태양은 상관없이 항상 따뜻하게 세상을 비출 뿐입니다.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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