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는 대서양을 건너 인도(동아시아)에 닿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결과적으로는 도착한 곳은 신대륙이었지만...]

한편, 반대 진영은 이를 의심했다. 그들이 보기에 콜롬버스 항로는 멀리 돌아가는 길이어서 도중에 새로운 보급품을 받지 모한다면 굶어죽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참고로 당시 '지구가 평평해서 콜럼버스가 지구 모서리 바깥(지옥)으로 떨어질 것.' 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콜럼버스 이전(이미 오래전)에 유럽에서 확립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평평하기에 모서리 바깥(지옥으로) 떨어졌을 것이다'라는 발상은 19세기에 꾸며진 관념이다. 중세사람들이 이 주장을 들었다면 아마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출처: 과학혁명 - 고유서가 p.30

 

중세 유럽인들이 지구를 평평하다고 믿었다는 헛소문이 만들어져 유포됨은 19세기 일이다. 특히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미국 작가인 워싱턴 어빙이다. 그는 1828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삶과 항해》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에서 콜럼버스는 지구 구형설을 받아들인 근대적 지식인으로 그려져 있는 반면, 당대의 관료들과 종교인들 대부분은 지구를 평평하다고 생각하는 무지몽매한 사람들로 묘사되었다. 그는 콜럼버스라는 주인공을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악의적으로 깎아내린 것이다. 이런 잘못된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출처: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12/2009061201839.html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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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 존 페리는 흥미롭게도 철학과 교수입니다. 매우 저명한 철학자 입니다.

책은 몇 년전에 처음 읽었고, 지금까지 읽은 횟수는 3~4 번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독후감을 쓰려고 마음 먹은건 아주 예전이었는데, 미루고 미루다가 이렇게 글을 쓰네요.

 

독서 감상을 쓰려했으나 일단은 미루어야(;;) 겠습니다.

 

절판이 되어서 책을 구하기 쉽지는 않은데요. 대략적인 내용을 파악하고자 싶으시다면, 아래의 링크를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https://jmagazine.joins.com/forbes/view/325798

https://www.joongang.co.kr/article/14076571#home

 

사족: 예전(절판되기 이전)에 마을 도서관에 이 책을 희망도서로 신청했는데, 거절당했습니다. 사유가 "장서 부적합[각주:1]"이었어요. 아마 사서가 제목만 보고 오해를 한 것 같아요. 맙소사...

"일을 미루고 불량하게 살자"같이 부정적인 내용을 담은 글이 전혀 아니에요.

미루기쟁이가 효율적/생산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책입니다. 삶에 대해 음미해볼 점들이 많아요. 부담없이 금방 읽을 수 있는 짧은 책이기에 여러분들께 추천하고 싶어요.

 

 

 

 

 

 

  1. 공공성에 위배가 되어 공공도서관 장서로서 부적합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본문으로]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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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certainty, in the presence of vivid hopes and fears, is painful, but must be endured if we wish to live without the support of comforting fairy tales. [...] 

To teach how to live without certainty, and yet without being paralyzed by hesitation, is perhaps the chief thing that philosophy can still do for those who study it.

생생한 희망과 공포 앞에서, 불확실성이란 것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견뎌내야만 한다. 단지 위안을 주는 동화 속에 의지하여 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확실성이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것인지, 그리고 [확실성이 없는 세상에서] 주저함에 의해 마비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은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을 위해 철학이 할 수 있는 주요한 일이다.

 

 

참고

신념의성: https://ideaspace.tistory.com/1173

파이어아벤트 주의자: https://ideaspace.tistory.com/1540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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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틈히 읽었습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18744508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YES24

러시아 원전을 직접 번역한 톨스토이의 중·단편 모음집 19세기 러시아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이자 대사상가인 톨스토이의 중‧단편 약 50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10편을 선별해 엮은 톨스

www.yes24.com

 

매우 쉬운 문체로 쓰여있습니다. 

중, 고등학생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책은 톨스토이 단편선입니다. 즉, 여러가지 단편 소설들을 모아놓았습니다.

이 책의 모든 소설은 흥미롭게도 권선징악이라는 한 가지 주제로 엮여 있습니다.

 

* 떠오르는 생각. 

1. 세상은 권선징악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을까? 나쁜 사람은 정말 필연적으로 벌을 받을까?

2. 우리는 선하게 살아야 할까? 가령, 나보다 어렵고, 굶주린 이들을 왜 도와야 할까? 

"만약 선하게 살아야 한다!" 라고 답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혹은 나 자신에게] 어떻게 정당화해야 할까?

3. 톨스토이식 방법(전래동화/구연동화/이야기 식의 교육: "나쁜 사람은 고통을 받았고, 선행을 한 주인공은 결국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이 최선의 정당화 수단일까?

톨스토이식 방법을 거부한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선하게 살아야 함을 정당화(설득)해야 할까? 다른 바람직한 방법은 무엇일까?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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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고등학생들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쓰여져 있습니다. 인류학에 대한 배경정보가 없는 일반인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소재도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다만, -아마 일반 독자를 배려하기 위함으로 보이는데요- 피상적으로 적혀있는 부분이 다소 있었습니다. 그러나 뒤에 참고문헌이 있으니, 더 깊이 있는 이해를 원하는 싶은 독자라면, 관련 자료를 찾아 깊이있게 공부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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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지 않은 신념을 지니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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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행복의 정복

9. 세상과 맞지 않는 젊은이

 

현대 사회의 경우 도덕관과 신념이 철저하게 여러 계층으로 갈라져있다.

Q. 언제부터 도덕관과 신념이 갈라지기 시작한걸까?

A. 종교 개혁과 함께 시작되었다. 청교도와 가톨릭교도는 신학뿐만 아니라 여러 문제에서 견해 차이를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계급 간에도 도덕관과 신념의 차이가 보인다. ex) 귀족들은 부르주아들이 용인하지 않는 여러 가지 행동을 허용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분열이 존재한다. ex 1) 어떤 계층은 예술을 찬양하고, 어떤 계층은 현대 예술을 사악하다고 생각한다. ex 2) 제국에 대한 충성이야말로 최고 선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런 충성을 악덕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ex 3) 간통을 극악한 범죄로 여기는 사람도 있고, 몇몇 사람은 용서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ex 4) 가톨릭 교도들은 이혼을 심하게 금지하는 반면, 비가톨릭교도는 이혼을 결혼 관계의 수정 정도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다양한 견해 차이로 인해 특정 취미와 신념을 가진 사람이 어떤 사회에서는 배척당하지만, 다른 사회에서는 평범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다.

 

사회 구성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관이나 생활 방식을 가진 경우 엄청나게 많은 불행이 생긴다. 특정 사상을 받아들인 젊은이는, 자신이 받아들인 사상이 사회와 충돌하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완전히 잘못된 견해라고 비난받을까 싶어 언제나 전전긍긍한다. 그들은 청년기뿐만 아니라 평생 이런 불행을 겪어야 한다. 그들은 적대적인 환경에 맞서서 정신적 독립성을 유지하는 데 엄청난 정력을 낭비해야 한다.

ex) 소설가로 유명한 브론테 자매는 자신의 책이 출판된 뒤에도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대담하고 당당한 에밀리 브론테에게는 문제가 안 되었지만, 샬럿은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정신적 고립감을 이기기 위해서는 뛰어난 용기가 있어야 하지만, 내면에 이 정도의 힘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지배적인 신념과 관습에 순응한다. 하지만 이런 순응적인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도 아주 드물게 존재한다. 지적 또는 예술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이런 소수의 부류에 포함된다.

 

[이러한 소수 부류의]뛰어난 재능을 가진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몹시 불행한 청소년기를 겪는다. ex) 심각한 책을 읽으려고 하면 친구들이 비웃고, 선생님이 꾸짖는다. 좀처럼 보기 힘든 직업을 선택하고자 하면, 사람들은 욕하면서 아버지가 했던 직업을 선택하라고 말한다.

=> 이런 사람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으려면 여론의 횡포를 모면해야 하고, 지적 소수파 구성원들이 서로 교제하면서 즐겁게 지낼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나는 지나치게 반항적인 태도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옹호하는 것은 단지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다든가, 특정 분야의 책들을 읽는 것 정도, 즉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언행에서 가볍게 벗어난 경우를 말한다.

 

대중과 전혀 다른 취미와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관례에 순응하려 노력하면서 예민한 문제들을 피해간다.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으니 자연스럽게 신경 과민이 되고, 기분이 언짢으며 호전적인 태도를 취한다. 만약 이러한 사람들이 다른 사회로 옮겨가면 완전히 성격이 달라질 것이다. 자기 중심적인 태도는 사라지고 상냥하고 외향적인 태도가 나타날 것이다.

 

만약 당신이 대중과 다른 취미를 가진 젊은이라면, 직업을 선택할 때 가능하면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직업을 골라라! 이는 수입보다도 우선시 되어야 할 사항이다.

 

주위 사람들이 무지, 편견 등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 주위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지 못한다면 남다른 재능이 있다는 것일 수도 있다. ex) 불온 사상을 주장했던 갈릴레이와 케플러를 생각해보자. 현대에도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들 역시 불온 사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재능있는 젊은이들이 지나치게 험난한 길을 걸어가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젊은이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려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이다.

젊은이들 또한 나이 많은 사람의 압력에 굴복해선 안 된다. 이는 분별력이 부족한 행동이다. 가령, 연극 생활을 동경하는 젊은이를 생각해보자. 부모는 연극 생활은 너에게 맞지 않는다. 연극을 한다면 인연을 끊겠다라고 반대할 것이다. => 물론 부모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원하는 바대로 해봐라. 만약 당신이 연극에 실력이 없다면 이후 연극계 전문가들이 충고를 해줄 것이다. 그때 가서 직업을 바꿔도 늦지 않다.

, 부모가 주장하는 바를 당신의 행동의 이유로 삼아서는 안 된다. 당신이 원하는 바를 실행에 옮기면 부모는 생각보다 훨씬 빠른 시간 안에 양보할 것이다. , 부모와 달리, 전문가의 의견은 항상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초보자는 늘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남의 의견을 지나치게 존중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굶어죽지 않고 감옥에 가지 않을 정도로만 여론을 존중하면 된다. 여론을 지나치게 존중하는 것은 지나친 횡포에 자발적으로 굴복하는 것이고, 행복을 가로막기 십상이다. 여론에 무관심한 것은 행복의 원천이다.

 

구성원의 획일화는 위험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달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행동하는 사회보다는 인습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훨씬 더 다양한 개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사회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괴팍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관례에 얽매인 행동만큼 재미없는 행동이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타고난 성격대로 행동하자는 것이다. [,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넘어가서는 안된다]

 

여론에 대해 큰 두려움을 가질 경우 사람의 마음을 옥죄고 발전을 저해한다. 이로 인해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기는커녕 행복이 깃들어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없다. 행복의 필수조건은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충동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언론에 대하여

오늘날 언론의 평가[특정인에 대한 언론 보도]에 대한 두려움은 과거 마녀 사냥에 대한 두려움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심각하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고도화된 언론의 보도 방법은 위험성을 점점 심화시키고 있다. 언론이 가하는 박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현재의 명예훼손 법보다 더 강력한 방침이 필요하다. 특정인에 대해 악의적으로 보도하여 무고한 개인의 일상 생활을 위협하는 관행은 금지되어야 한다.

=> 이러한 불행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치료법은 대중이 관대한 태도를 기르는 것이다.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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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의학이 발달하기 전, 최악의 피부병은 매독이었다. 매독은 가벼운 부스럼으로 시작해, 뼈가 드러날 정도로 피부가 썩어들어나는 병이다.

이러한 매독은 장소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러시아에서는 '폴란드 질병', 폴란드에서는 '독일 질병', 독일에서는 '프랑스 질병',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 질병', 그리고 이탈리아 사람은 '프랑스 질병'이라고 불렀다.

희생양을 찾으려는 본능은 인간 본성의 핵심이다. 매독을 스웨덴 사람이 '스웨덴 질병'이라고 부른다거나, 러시아 사람이 '러시아 질병'이라고 부를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인간이란 원래 그렇다. 우리에겐 비난할 사람이 필요하다. 만약 어떤 외국인이 어떤 병을 옮겼다면, 그 외국인이 속한 나라를 주저없이 통째로 비난하곤 한다. 자세한 조사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팩트풀니스 9장 비난 본능 307p. 참고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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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행복의 정복>> 4장에서 러셀은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는 자극을 버리고, 조용하게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조용하고 단조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지루해보이지만 지루함(권태)을 견디는 힘이 행복한 삶의 필수 조건이라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 결론을 내린 것일까?

나는 논문을 쓰고 연구를 해야하는 대학원생이다. 논문을 쓰고 공부하는데 가장 힘든 것은 지루함, 외로움, 즉 권태를 견디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점에서 러셀의 주장은 어떠한 답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뿐만 아니라 러셀의 생각은 외로움, 고독함을 느끼는 현대인에게도 분명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이를 정리하여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요약 시작-----------

권태(지루함)은 인간 특유의 감정이라고 여져진다. 짐승들은 권태와 비슷한 것을 느낄 겨를이 없다. 적을 경계하거나 먹이를 찾는일, 짝짓기 등에 노력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권태의 반대는 즐거움이 아니라 자극이다. 평소와 다른 일(자극)이 생긴다면 얼마든지 권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적으로부터 도망치거나, 사형당하는 순간을 생각해보라. 매우 불쾌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권태를 느끼지 않는다.

수렵 채질 시절에는 권태를 느끼지 않았다. 동물을 추적하는 것, 전쟁, 구애 역시 자극적이었다. 원시인은 옆에 잠든 남편 옆에 누운 여자와 정을 통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결코 권태롭지 않다.

하지만, 농경 사회로 접어들면서 삶은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저녁 식사가 끝나면 가족들이 둘러앉아 시간을 보냈다. 이후 아버지는 잠들고,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고, 딸들은 '죽거나 딴 곳에 가버렸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에 잠겼다. 딸들은 책을 읽을수도 없고 방을 나올 수도 없었다. 중세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사람들은 글을 읽고 쓸 줄도 몰랐다. 방 안의 촛불만이 어둠을 밝히고, 길은 통행이 불가능한 상태이기에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 생활은 지루했기에, 마녀 사냥만이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유일한 소일거리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떠한가? 오늘날 사람들이 겪는 권태 정도는 이전보다 덜하지만, 권태에 대한 두려움은 훨씬 깊다. 현대인들은 권태를 피하기 위해(=자극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가령, 사람들은 자동차 혹은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타고 영화를 보러간다. 집집마다 라디오, TV가 있고, 젊은 남녀가 만나는 것도 이전에 비하면 상당히 쉬운 일이 되었다. 

사회적 계층이 높을수록 점점 강렬한 자극을 추구하게 된다.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춤을 추고 술을 마시며, 부자들은 권태로울 새 없는(지루할 새 없는) 삶을 이상으로 여긴다. 나[러셀]는 이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러한 이상을 달성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전날 밤의 즐거움이 클수록 아침의 권태는 더 깊어지게 된다. 결국 중년이되고, 노년이 될 것이다. 

권태는 인생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로서, 전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자극이 지나치게 많은 삶은 밑 빠진 독이나 다름없다. 많은 자극을 바라는 사람들은 환희에 가까운 감격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점점 더 강력한 자극을 찾을 수밖에 없다. 가령, 후추를 병적으로 좋아해서 남들이 보기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많은 후추를 먹어도 본인은 별 맛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과 비슷하다.

지나치게 많은 자극은 건강을 해칠뿐만 아니라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즐거움이 점차 무뎌지게 된다. 나[러셀]는 자극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그 양에 있다. 자극이 너무 많으면 심신을 황폐하게 한다. 그러므로 권태를 견딜 수 있는 힘은 행복한 삶에서 필수적이다. 

아무리 훌륭한 소설이라도 지루한 부분이 있고, 훌륭한 위인들의 삶 역시 결정적인 몇 부분을 제외하고 흥미거리가 없다. 칸트는 평생 동안 쾨니히스베르크에서 16킬로미터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고, 다윈은 세계일주를 한 뒤 남은 생애를 자신의 집에서 보냈다. 마르크스는 몇 차례의 혁명을 선동 한 뒤 여생을 대영 박물관에서 보냈다. 전체적으로 조용한 삶이 위인들의 특징이며, 위인들이 누렸던 기쁨은 외부인의 입장에서 결코 흥미롭게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단조로운 삶을 견디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요즘 부모들은 이 점에서 비난 받아야 한다. 요즘 부모들은 영화, 음식 같은 자극적인 오락거리를 너무 많이 제공한다. 부모들은 아이가 날마다 비슷한 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지 못한다. 어린 아이는 단조로운 삶 속에서 스스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오락 거리를 자주 제공하거나 지나치게 다양한 인상(잦은 여행, TV 등)을 심어줘서는 안된다. 이런 아이들은 어떤 성과를 얻기 위해서 반드시 견뎌야 하는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어른이 될 수도 있다.

지루함이 유익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루함을 참아내지 않고는 뛰어난 성과를 거둘 수 없다. 가벼운 흥밋거리나 오락에 빠져있는 젊은이에게 건설적인 목적이 들어가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 젊은이의 관심은 멀리 있는 목적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즐거움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비유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써보자면, 우리는 대지의 창조물이며, 우리의 생명은 대지의 생명의 일부분이다. 대지의 생명의 흐름은 매우 더디다. 대지에게는 봄과 여름 만큼, 가을과 겨울이 중요하다. 즉, 활기찬 활동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평온한 휴식도 중요하다. 인간은 수 세기에 걸쳐 대지의 생명[정리자: 자연 or 자연물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과 접촉해왔다. 대지의 생명[각주:1]과 접촉하는 것은 특히 어른보다 아이에게 중요하다. 

런던에만 살다가 처음으로 시골 초원에 간 일이 있다. 당시 겨울이었고 모든 것이 축축하고 진흙투성이었다. 어른들이 보기엔 흥미 없었으나, 두 살배기 아이는 황홀감에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 아이는 땅바닥에 앉아 얼굴을 풀속에 묻었다. 아이가 가졌던 이러한 황홀감은 매우 근원적인 것이다. 

반면, 오늘날의 쾌락 중에는 대지와 접촉할 여지가 없는 것들이 많다. 좋은 예로는 도박이 있다. 도박을 통한 쾌락이 끝나자 마자, 그 사람은 답답함, 불만, 허기를 느낀다.  반대로 대지와의 접촉은 깊은 충족감을 준다. 물론 이로 인한 쾌감은 자극적인 오락에 비하면 훨씬 약할 수도 있지만, 쾌락이 끝난 뒤에도 지속적으로 남아 있다. ex) 셰익스피어 서정시에도 두살 먹은 아이가 느낀 것과 같은 기쁨이 가득 넘치고 있다. "들어라, 종달새의 소리를Hark, hark, the lark", 혹은 "여기 노란 모래밭으로 오라 Come unto these yellow sands"같은 시를 생각해보라. 자연과의 혼연일체로 인한 황홀감이 세련되게 표현되어 있다. 

사랑 vs 애정 없는 성관계를 생각해보자. 사랑의 경우 가뭄 끝의 단비로 식물이 되살아나듯이 활력을 불어놓고, 우리를 새롭게 한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성관계의 경우 순간적인 쾌락이 있지만, 끝난 후 피로감, 혐오감, 공허감만 남는다. 사랑은 대지의 일부이지만, 사랑이 없는 성관계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현대인들이 느끼는 권태는 대지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대지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삶은 갑갑함, 답답함을 가져온다. 돈이 많은 부호들은 권태를 두려워하여, 자극을 추구하려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더 나쁜 권태에 빠지고 만다. 

행복한 인생이란 대부분 조용한 인생이다. 진정한 기쁨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만 깃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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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위의 꽃, 나무, 나비, 밝게 비치는 태양 빛 등 [본문으로]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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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관련 정보: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behappy4001&logNo=90124584067

첫 조카가 벌써 30개월이 되어간다.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어 이 책을 접한 것은 아니다.

한 번은 조카가 책을 읽어달라고 하기에, 아무 책이나 가져왔는데 이 책이었다.

한 번 읽어준 후로는 이 책이 꽤 마음에 들었던지, 나만 보면 이 책을 읽어달라고 조른다. [한 20~30번은 더 읽은 것 같다...]

 

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친구 집에 놀러와서 친구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장난감을 뺐어서, 서로 싸우고 둘은 울게 되었다. 

결국 둘은 엄마한테 혼이나고, 그 중 한 친구는 삐져서 방으로 들어가버리는데,

이후 화해하고 다시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읽을 때 책 속의 글을 그대로 읽어주는 방법도 있겠지만, 나는 보통 그림 내용을 묘사한다. 

가령, 이 아이는 이러하게 하고 있고, 저 아이는 저러하게 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반복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책(그것도 매우 단순한 그림책)을 계속 몇 번이고 읽는 것은 나로서는 꽤 힘든 일이다. 

그림 묘사가 다 끝난 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하면, 알아서 다음 장으로 잘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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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 읽다보면, 아이도 내용을 알기 때문에, 그림의 상황에 대해 아이에게 물어보는 것(아이에게 상황을 설명해 달라고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그림을 펼쳐놓고 "둘이 뭐하고 있지?", "이 사람은 누구야?", "왜 울고 있을까?" 등을 물어보는 것이다. 20~30번 읽은 상황이라면 아마 대답을 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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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승현이가 이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

책을 읽고 나서 승현이에게, 만약 친구가 장난감을 달라고 하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승현이는 "안 줄거야"라고 했다.

승현이가 다시 책을 또 읽어달라고 해서, 좋아하는 인형 두 개를 가져오라고 한 뒤 다시 책을 읽어주었다.

책을 한 번 더 읽고 나서, 친구가 이 인형을 가지고 놀고 싶다고 하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승현이는 곰곰히 생각을 한 뒤 "나는 친구한테 줄거야"라고 대답했다. 책을 다 읽고나서 인형 하나를 놓고 갔다.

 

원하는 것들을 생각대로 다 가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세계의 자원은 한정적이다. 

결국 우리는 다른 공동체 구성원들과 자원을 지혜롭게 나누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승현이가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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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인생 여정을 다룬 만화책.

술술 금방 읽는다. 

철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어도 읽을 수 있긴 하다.

그러나 다루는 내용들이 의외로 깊다.

배경지식[적어도 철학에 대한 교양 수업 수준의 지식]이 있을 때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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